▲강정희 각설이타령 예술가
김영숙
강씨는 충청도에서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네 살 때 온 식구가 서울 신길동으로 이사했다. 큰오빠가 당시 철도국에 취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로 이사 하는 과정에서 사고로 어머니를 잃었다.
"아버지가 눈이 안 보이는 일을 겪었어요. 저도 어렸을 때라 어른들이 하는 얘기만 듣고 그 기억밖에 없는데, 아버지가 물구덩이에 묻힌 묘를 옮기는 일을 하고 나서 눈이 멀었대요. 그리고 저를 포함한 6남매는 머리가 하얗게 됐고요."사실 확인을 하고 싶을 만큼 믿기 어려운 얘기들이다. 강씨의 구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의 기구한 인생에 처연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버지가 눈이 멀어 어머니가 가장노릇을 해야 했다. 어머니는 이사를 하는 과정에서 큰 쌀독을 충청도에 두고 온 사실을 뒤늦게 알고 다시 충청도로 내려가 항아리를 들쳐 업고 올라왔다.
그런데 1950년대 초반, 논이 대부분인 신길동에서 논두렁을 걷다가 항아리가 떨어져 힘줄이 끊어지는 사고로 죽음에 이르렀다. 지금에야 큰 사고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 일로 어머니를 잃었다.
시장통에서 떡집하며 풍악 즐겨
그의 나이 스물 셋에 서울 양평동으로 시집을 갔다.
"제가 양평동에서 떡집하면서 30여 년간 새마을부녀회 활동을 했어요. 새마을협의회 회장님이 '덩덩 쿵따쿵' 풍물을 처음 가르쳐주셨는데, 그걸 배워서 사람들과 공연을 다니기도 했죠. 개인적으로 복지회관에서 배우기도 했고, 인천 와서는 주민센터에서 배우기도 했습니다."활달한 성격의 강씨는 새벽에 에어로빅을 배우러 여의도광장까지 가기도 했다. 그 당시 여의도광장에는 효창동 등, 서울 사람뿐만 아니라 인근 안양에서도 사람이 모이곤 했다. 에어로빅을 배우기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에어로빅 강사는 강씨를 부르더니 사람들을 가르치라고 해, 당황한 기억도 있다. 그 후 강씨는 양평동에 있는 작은 공원에서 사람들을 모아 에어로빅을 가르치기도 했다.
힘들지만 재밌게 살던 강씨에게 어려운 일이 연거푸 일어났다. 큰애가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때, 강씨는 큰애와 동네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그때 떡집 근처에서 고물상을 하던 아저씨가 큰애의 배드민턴 채를 빼앗아 강씨와 치자고 졸라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 모습을 그녀의 남편이 목격했다. 남편은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와 양쪽 뺨을 사정없이 때렸고, 그로 인해 양쪽 고막이 찢어졌다.
"양쪽 귀에 인공고무를 넣고 다니는데 비행기 소리처럼 '우릉'거리는 소리가 나요. 빨리 세상을 뜨려고 저한테 사랑을 한꺼번에 쏟기 위해 그 극성을 피운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강씨와 여덟 살 차이인 남편은 그녀의 나이 마흔다섯에 2남 1녀를 남겨두고 세상과 이별 했다. 남편과 이별한 후 그녀는 혼자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갖은 고생을 했다. 일을 많이 해 어깨와 허리 등 관절이 좋지 않아 수술을 하기도 했고, 급기야 시장통에서 같이 장사하던 사람과의 갈등으로 쓰러져 뇌수술을 받기도 했다. 그때 강씨는 50대 중반이었다.
노랑머리에서 빨강머리로 변신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