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환 옹기장이 가마에 땔감을 넣는 모습. 옹기를 굽는 계절에는 전수자인 아들 성일씨와 밤낮 번갈아가며 이렇게 삼사 일 불과 씨름을 해야 한다. (캔버스에 유화로 채색)
유순상
그러나 단꿈은 잠시, 신산스러운 시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플라스틱과 양은 등 가볍고 질긴 용기들이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79년 정부가 '옹기에 납 성분이 많다'며 전국 옹기공장들을 단속했다.
흙 자체에 함유된 납이 보통 0.4피피엠(ppm:100만 분의 1g)인데, 정부가 옹기에 쓰는 유약인 광명단의 납 허용치를 0.1ppm으로 규정해 기준을 맞출 수가 없었다. 3년 뒤 인천 옹기공장 최기영 사장과 변호사들의 도움으로 옹기의 납 허용치를 1ppm으로 올리는 데 성공했지만, 그 사이 많은 도공들이 버티지 못하고 떠났다.
"옹기는 투박하고 쓰기가 나쁘거든. 거기다 박정희 대통령도 입산 금지령을 내렸어. 산림 보호를 한다며 옹기 공장이 나무를 연료로 쓸 수 없도록 혔지. 얼마나 힘들었던지 일을 혀도 남는 건 없고 그려서 그 때 4남 1녀 공부시키려고 땅도 대부분 팔아 버렸지."인고의 세월 거쳐 무형문화재 됐지만... 다시 닥친 시련 그저 버티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이 흐르자 시대는 다시 박옹을 주목했다. 2003년 충청북도가 '200년 역사의 가마터와 옹기 기술이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다'며 그를 충북 무형문화재 제12호 옹기장으로 선정한 것이다. 또 여러 대학에 도예과가 생기면서 연구자들이 옹기기술을 배우고 기록하러 박옹을 찾아왔다.
2009년에는 캐나다에서 열린 세계무형문화재 작품전에 똥장군 두 점을 출품해 관심을 받기도 했다. 2010년에는 울산 세계옹기문화엑스포 광고모델로 선정돼 봉산리 가마에서 엑스포 성화의 첫 불을 밝히는 영광도 누렸다.
"서양에도 옹기가 많겠지만 똥장군의 역사가 그들에게 새롭고 신기한 볼거리였던가 봐. 우리나라는 70%가 산이라 농경지가 산 쪽에 많이 붙어있어. 조상들은 똥장군에다 똥을 담아 지게에 지고 밭에 가서 바가지로 퍼주었지. 똥이 곡식을 키우는 천연 비료였던 겨."흙냄새가 싫다며 떠났던 셋째 아들이 계승자가 되겠다며 돌아오고 시장에서 옹기의 인기도 높아져 살 만하다 싶었는데, 재개발을 해야 하니 봉산리를 떠나라는 지자체의 압력이 닥쳤다. 박옹은 봉산리 가마가 문화재로서 보존돼야 한다며 맞섰다. 시행사인 충북개발공사가 지난 2008년 오송읍 일대의 문화재 지표조사를 추진하면서 이 일대를 누락시키는 등 절차도 잘못됐다고 항의했다.
특히 문화재청이 재조사 요구를 받아들이고서도 지표조사를 미루는 사이 충북개발공사가 지난해 10월 가마터 감정평가를 하겠다며 강제로 옹기점에 들이닥친 일이 있다. 이를 막는 과정에서 박옹과 성일씨가 머리와 목 등에 각각 전치 4주의 부상을 입었다. 박성일씨는 해당 직원들을 살인미수와 재물손괴 혐의로 고소한 상태다.
지난 13일, 충북개발공사 관계자는 전화 인터뷰에서 "문화재청이 공식적으로 봉산리 가마를 문화재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사를 미룰 수 없다"는 입장을 재확인해 주었다. 관계자는 "현행법에 따라 감정평가를 하고 철거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성일씨가 낸 고소도 "취하하지 않으면 업무방해 혐의로 맞고소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옹의 옹기점이 보존되기 위한 관건은 가마가 문화재로 인정받느냐 여부다. 충북개발공사는 지난해 3월 연구용역을 통해 '봉산리 '칸가마'는 축조형태나 재료를 보아 20세기 이전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보통 국내 가마는 안이 합쳐진 통가마인데, 봉산리는 가마 안이 여러 칸으로 나뉜 일본식이어서 200년이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박옹은 해당 연구원에 옹기전문가가 없고 지적한 부분도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반박했다.
"충북개발공사가 용역을 준 연구원은 옹기전문가도 없이 가마터를 5분쯤 훑어본 게 조사의 다였어. 엉터리 소견서를 써 낸 거지. 우리 칸가마가 전통이 아니라고 하는데 국내 저명한 옹기전문가의 기록을 보면 일본에서도 고려청자를 만들기 위해 납치한 우리 도공을 시켜 칸가마를 만들게 했다는 기록이 많여. 고려청자는 1400도가 넘어야 유약이 녹는데, 통가마로는 안 돼. 칸가마로 했다는 기록이 많다고."문화유산에 대한 연구와 보전운동을 펼치는 비영리단체 내셔널트러스트도 지난해 1월 봉산리 가마를 보존대상으로 선정했다. 200년 넘게 맥을 이어온 전통 가마로, 규모가 크고 다양한 형태로 보존돼 있어 (한국) 가마의 변천사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또 초창기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온 천주교인들이 교우촌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역사문화적으로 중요한 현장이라고 강조했다.
"창조경제가 뭐여. 전통을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도 창조 아녀? 저 가마가 보기에는 험상시러워도 불통하고 불구멍하고 다 과학적으로 작용하게끔 맞춰졌어. 저걸 부숴서 다른 데서 만들라고 하는데 나도 똑같이 만드는 법을 몰러. 괜히 워디가서 만들었다가 (옹기가) 금방 깨지기 쉽지."시인 정호승은 자신이 쓴 동화 <항아리>에서 이렇게 썼다.
"항아리가 된 내가 그 무엇을 위해 소중하게 쓰이는 존재가 될 줄 알았으나, 나는 버려진 항아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소나기가 지나가면 빗물이 고였습니다. 빗물에 구름이 잠깐 머물다가 지나갔습니다. 가끔 가랑잎이 찾아와 맴돌 때도 있었습니다. (중략) 만일 그들마저 찾아와 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그대로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중략) 나는 그 누군가를 위해 사용되는 가장 소중한 그 무엇이 되고 싶었습니다."비바람 속에서도 뒷마당을 묵묵히 지키던 장독처럼, 채운만큼 비워주는 쌀독처럼 우직하게 살아온 박옹은 봉산리를 떠날 수 없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내 그릇이 새지 않고 소비자가 좋다고 할 때가 제일 뿌듯허지. 소비자가 인정할 때여. 그런데, (그건) 내가 잘 만들었다기보다는 여(여기) 점토가 좋아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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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트레블러17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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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비영리단체 민족학교, 전 미주 중앙일보 기자, 전 CJB청주방송 기자
<오프로드 야생온천>, <삶의 어느 순간, 걷기로 결심했다>, <내뜻대로산다> 저자, 르포 <벼랑에 선 사람들> 공저
uq261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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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주목한 '똥장군' 두 점, 한국에선 사라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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