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우섭 인천남구청장.
권우성
박우섭은 2월 8일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한 8명 중 1명이다.
경쟁자들은 모두 여의도 국회에 사무실을 둔 국회의원이지만 그는 현역 구청장(인천 남구)이다.
지난 4일에는 당 소속 기초단체장 81명 중 77명이 대전역에 모여 그를 후보로 추대하는 퍼포먼스도 벌였다. 뭔가 특별한 게 있어보였다. 인물현대사가 13일 그를 만난 이유다.
1955년 7월 22일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당진에서 자란 박 구청장은 1972년 서울대 미생물학과에 입학했다. 시인 김정환(영문과)과 황지우(미학과), 전 국무총리 이해찬(사회학과), 민주당 전 대통령후보 정동영(국사학과) 등이 그의 동기다.
그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부터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생명의 신비, 특히 창조론을 과학적으로 입증해보겠다는 야심찬 꿈이 있었다.
그러나 신입생 박우섭을 사로잡은 것은 문리대 서클 '연극회'였고, 당대의 많은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이곳에서 '문화'뿐만 아니라 '사회'를 배웠다. 1학년 가을 '10월 유신'으로 국회가 해산되고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권을 부여하는 헌법이 제정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서울 도심 한복판인 혜화동에서 크고 작은 시위로 박 대통령의 신경을 건드렸던 서울대는 1975년 1월 20일 남쪽의 관악산 골짜기로 옮겨졌고, 학교 입구에는 학생 시위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동양 최대' 규모의 관악파출소가 들어섰다.
그해 4월 3일 오후 1시로 예정된 학내 시위는 관악산으로 이전한 후에도 서울대 학생운동의 전통이 끊어지지 않았음을 박정희정권에 보여주는 '선전포고'의 장이었다. 그에게 이날의 '현장 지휘' 임무가 부여됐다. 시위가 끝나면 엄한 학사징계와 감옥행을 감수해야하는 일이었다.
"이제 4학년이니 졸업하려면 공부를 해야 하는데 연극반 동기 박인배(물리학과 72학번, 세종문화회관 사장)가 '사람을 모아달라'고 부탁해서 내가 나서게 됐다"라는 게 박 구청장의 설명. 2000여 명이 시위에 참여하고 700~800여 명이 봉천동 고개까지 진출했다. 시위 현장에서 붙잡힌 125명 중에는 훗날 이명박 정부의 기획재정부 장관이 된 박재완 교수(성균관대 행정학과)도 있었다. 그는 이로 인해 '구류 29일'의 값비싼 댓가를 치렀다.
8일 뒤 서울대 농대 집회에서 축산학과 김상진씨가 시국선언문을 낭독한 뒤 할복자살하며 4·3 시위의 사회적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시위를 주동하고 달아난 박우섭으로 인해 가장 곤란해진 사람은 그의 아버지(2005년 별세)였다. 아버지는 정년 퇴임을 앞둔 베테랑 경사였다.
"아버지를 내세워 자수를 설득하는 통에 경찰서에 자진출두할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징집됐다(중이염 판정으로 1년 6개월 단기사병 복무). 아버지는 처음에 내가 하는 일에 가장 강하게 반대했지만, 훗날 충남 당진에서 <한겨레> 지국장을 맡을 정도로 내 편에 서 주셨다."'학원 소요사태' 수배자 명단에 오르다1976년 가을 전역한 그는 갈 곳이 없었다. 서울대는 그가 징집될 무렵 그를 퇴학시켰다. 운 좋게도 그는 대한항공 고졸사업 공채에 응시해 합격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회사원 생활은 생계의 어려움은 덜어줬지만 그가 정말로 하고싶은 일은 아니었다. 진짜 보람은 대학시절 연극회의 연장이었던 연우무대에서 나왔다. 1977년 창단된 연우무대는 동일방직이나 청계피복노조 증 노동현장을 소재로 하거나 현실풍자적인 작품들을 내놔 우리나라 공연 문화의 흐름을 바꿔놨다.
1979년 10월 17~18일 창작소극장에서 무대에 올린 <한줌의 흙>은 1977년 4월 20일 광주 무등산에서 구청 철거반원들을 살해한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을 다룬 재판극이었다. 그는 이 작품의 대본을 쓰고, 검사 역을 맡았다. 이듬해 3월 그와 김명곤 전 문화부 장관이 출연한 <장산곶매>(황석영 원작 이상우 연출)는 연우무대 스스로도 초기 대표작으로 꼽는 작품이다.
그는 연우무대 활동을 위해 오후 6시 퇴근해서 밤새 극 연습을 하고 아침에 출근하는 일상을 반복했다. 훗날 치른 고역을 생각하면, 이런 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1978년 9월 13일 서울대 교내 시위를 기획한 후배 이우재, 성욱에게 도피처를 제공했다가 같은 해 11월 경찰에 체포됐다. 한 달간 구치소 신세를 진 뒤 풀려났을 때 그는 이미 대한항공에서 쫓겨난 신세였다.
지난해 12월 12일 박 구청장에게도 낯익은 얼굴이 TV에 나왔다. '땅콩 리턴' 사건의 장본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을 수행한 한진의 서용원 대표이사가 그의 회사 직속상관이었다. 박 구청장이 그때 후배들을 숨겨주지 않았다면 그 또한 회사에 잘 적응해 더 높은 지위에 올랐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한편으로 대한항공 퇴사는 연우무대 등 문화 운동에 전념할 계기였지만 1980년 '서울의 봄'이 끝나자 그는 다시 '학원 소요사태' 수배자 명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