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나온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비선실세 국정농단 의혹' 규명을 위해 지난 9일 오전 열린 국회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한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이 최근 청와대 문건 유출 파동에 대해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대해 깊이 자성하고 있다"고 공개 사과했다. 청와대 김영한 민정수석 불출석 문제로 여야간 설전이 오가며 회의가 정회되는 등 파행을 빚자, 김 실장이 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남소연
지난 한 해를 강타한 세월호 정국에서,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은 절묘하게 살아남았다. 김기춘의 질긴 생명력은 이른바 '정윤회 문건' 파동에서도 드러났다. 청와대에서 문건이 새어나갔으니 비서실장의 책임을 부정할 수 없는데도, 12일 신년기자회견에 나선 박근혜 대통령은 "당면한 현안들이 많아서 수습해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김기춘 비서실장 거취는)그 일들이 끝나고 나서 결정할 문제"라고 일축했다. '세월호'에 이어 '정윤회'까지 비켜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상당히 대단한 인물이다.
김기춘의 질긴 생명력은 조선 전기의 장수 정치인인 유자광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아니, 김기춘처럼 점잖고 스마트한 인물을 어떻게 유자광 같은 간신배와 비교할 수 있느냐?"라며 "폄하하려는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간신배니 어쩌니 하는 선입견을 버리고 '정치인 김기춘'과 '정치인 유자광'을 비교해본다면, 두 사람의 삶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판단에 도달하게 될지도 모른다.
1939년 경남 거제에서 출생하고 5·16 쿠데타 전년도인 1960년(당시 22세)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1963년부터 5·16장학회(정수장학회의 전신)의 장학생이 된 김기춘은 검찰청·법무부·중앙정보부에 근무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체제 유지에 기여했다. 그는 도전세력으로부터 반민주 독재체제를 방어하는 데에 앞장섰다. 참고로,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해군 법무관 생활을 하던 시절에 장학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기에 대학원에 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신헌법 제정에 참여한 한태연 전 공화당 의원의 증언에 따르면, 30대 초반이던 1970년대 초기의 김기춘은 박정희의 영구 집권을 위한 유신헌법 제정 작업에 핵심 실무자로 참여했다. 또 그는 1974년(35세)에 대통령을 쏘려다가 영부인을 잘못 쏜 문세광을 조사한 지 하루 만에 범행 일체를 자백 받는 실적을 거두었다.
'김기춘은 행운아'라는 말 증명한 초원복집 사건김기춘은 이듬해인 1975년(36세)에는 가혹한 고문을 동원한 끝에 '학원침투 북괴 간첩단 사건'을 세상에 내놓는 실적도 거두었다. 이 시기의 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의 대공수사국 부장으로서 정권 유지의 최일선에서 엘리트의 길을 달렸다.
그런데 1979년(40세)에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가 대통령을 저격했으니, 정상적인 경우였다면 그의 인생은 1979년 10·26 사건과 함께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을 수도 있었다. 사건 발생 직후 전두환 장군의 지휘를 받는 보안사 요원들이 가장 먼저 찾은 게 김기춘이었다고 알려졌을 정도로, 10·26은 그의 인생에서 일대 위기였다.
하지만 당시 40세이던 김기춘은 '마흔 살은 불혹(不惑)'이라는 말처럼 이 위기를 절묘하게 벗어났다. '6공 황태자' 박철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박철언을 통해 신군부 실세인 허화평의 도움을 얻어 위기를 빠져나갔다. 그 후 한직으로 밀리는가 싶었지만, 그는 어느덧 다시 살아나 노태우 정권 때인 1988년(50세)에는 검찰총장에 임명되고 1991년(53세)에는 법무부장관에 임명됐다.
김기춘이 행운아라는 점은 유명한 1992년(54세) 초원복집 사건에서도 잘 드러난다. 대통령선거 직전에 부산 시내 식당인 초원복집에서 열린 비밀 대책회의에서 그는 부산시장, 부산경찰청장, 부산교육감, 부산지검장, 부산상공회의소장, 안기부 부산지부장을 상대로 "우리가 남이가?"라면서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부추겨야 돼"라며 관권선거를 촉구했다. 그는 "부산·경남 사람들 이번에 김대중이 정주영이 어쩌니 하면 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자"는 극단적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김기춘은 이때 무너졌어야 했다. 하지만 타격을 받은 쪽은, 도청 장치를 설치해서 대화 내용을 녹음한 정주영 후보의 아들 정몽준 쪽이었다. 사건의 본질은 부정선거가 아니라 불법도청으로 바뀌었고 김기춘은 위기를 빠져나갔다.
75세에 대통령비서실장 임명... 질긴 정치생명그 뒤에 출범한 김영삼 정권 하에서 김기춘은 1996년(58세)에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으로 변신했다. 그것을 계기로 그는 3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던 중에 2004년 3월에는 국회 법사위원장 자격으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의 검사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2008년(70세)에 출범한 이명박 정권 때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국회의원 공천에서 탈락하고 2009년(71세)에 비영리 공익법인인 한국에너지재단의 이사장이 됐지만, 김기춘은 2013년 8월에 75세의 나이로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됨으로써 질긴 정치적 생명력을 또다시 과시했다. 박근혜 정권 하에서 그는 고소나 소송을 무기로 자신과 청와대에 대한 공격을 차단하며 질긴 정치생명을 이어나가고 있다.
김기춘은 오랫동안 정치 생명을 이어왔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높은 관직에 오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공직 인생에서 돋보이는 자리는 검찰총장·법무장관과 국회 법사위원장이다. 검찰총장을 지낸 기간은 2년, 법무부장관을 지낸 기간은 1년 5개월, 법사위원장을 지낸 기간은 1년이다. 오래 한 것에 비하면 관직이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다. 75세에 비서실장이 된 것도 그렇다.
작년에 총리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안대희 후보자가 과거에 했던 "나는 김기춘에 비하면 발바닥, 그의 아이큐는 170대일 것"이라는 말이 널리 알려졌다. 이렇게 주변 사람들이 능력을 인정해주는 것에 비하면, 김기춘의 관직 경력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다. 이것은 그만큼 그가 주변의 견제를 받으며 살았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런 속에서도 정치생명을 이어온 그의 수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서른 살 때 국방부 국장급 자리에 오른 유자광이 같은 김기춘의 생명력을, 조선 전기의 유자광(1439~1512년)은 이미 500년 전에 보여주고 갔다. 왕실 경호원으로 묻힐 수도 있었던 유자광을 역사무대에 데뷔시킨 것은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수양대군) 정권이었다. 계기는 조선시대판 공안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