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3월 25일에 열린 ‘인천 앞바다 핵 폐기장 철회를 위한 1차 인천시민 궐기대회’ 참가자들이 집회 후 인천시민회관 일대를 행진하고 있다.
한만송
인천시민이 핵 폐기장에 민감하게 대응한 이유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부는 집단민원이 상대적으로 적을 것으로 여겼던 굴업도를 핵 폐기장으로 지정했다(관련기사 :
문민정부가 굴업도를 핵 폐기장으로 지정한 이유).
인천은 외지인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아 지역 정체성이 없는 도시라는 평가를 받았다. 교육·환경·주거 조건 등도 수도권의 다른 도시보다 열악했다. 특히 굴업도는 1995년 이전까지 경기도에 속해 있었다. 이러한 여건을 놓고 볼 때 인천시민의 반발이 상대적으로 약할 것이라고 정부는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상일뿐이었다. 인천시민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당시는 인천의 시민운동이 막 태동하는 시기라, 시민운동의 영향력도 크지 않았다. 어떤 동력이 굴업도 핵 폐기장 저지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을까? '인천 앞바다 핵 폐기장 대책 범시민협의회(아래 핵대협)'의 활발한 활동과 여러 위험시설이 인천에 집중돼 있던 것이 주요 동력이자 요인으로 분석된다.
당시는 대구지하철 도시가스 폭발 대참사로 인해 인천에서도 대규모 위험 시설에 대한 걱정이 쏟아져 나온 때였다. 지방자치제도를 본격 실시하면서 개별화돼 있던 시민들의 우려는 응집력과 폭발력을 얻었다.
1995년 7월 26일 서구 가좌동 농약 원료 제조업체인 진흥정밀에서 대규모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이 사고로 6명이 목숨을 잃고 6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폭발사고로 경인고속도로를 달리던 자동차가 날아가고, 파편이 어지럽게 뒹구는 등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또한 사고현장에서 500m 떨어진 대우전자 건물 지붕이 내려앉고, 1km 떨어진 주택가의 유리창이 깨지기도 했다.
인천은 공업도시로 부평·주안 수출 공단과 그 주변의 지방 산업단지가 무분별하게 혼재돼있어, 주민들의 불안감이 많았다. 특히 화약고라 할 수 있는 한국화약 공장이 남동구 고잔동에 있었다. 이 공장의 면적은 726만여㎡에 달했고, 조명신호탄·연화류·농약 등을 생산하는 각종 설비가 들어서 있었다. 이 공장은 사고 위험도가 높고 실제로 사고가 빈발했는데, 반경 1km 안에 주거지역이 있었다.
동양화학 유공의 인천 저유소 등, 남구 학익·용현동 일대 대규모 위험시설도 시민들을 불안하게 했다. 학익·용현동 일대엔 위험물질 제조·취급 시설이 99만여㎡에 걸쳐 밀집돼 있었다. 그럼에도 인근엔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주택가, 대학 등이 위치해 있어, 문제의 심각성을 더했다.
연안부두 일대 유류가스 저장시설도 마찬가지였다. 중구 항동·북성동 일대엔 당시 유공·호남·쌍용 등 국내 굴지의 정유회사 유류가스 저장시설이 밀집돼 있었다. 호남정유 인천 저유소는 휘발유·벙커유·항공유·크실렌 등을 16만 9000여킬로리터 저장할 수 있는 탱크 62기가 있었다. 연안부두 일대의 위험시설물은 초대형인데다 폭발력이 강한 LNG 저장탱크와도 인접해있어, 사고 위험성이 높았다.
여기다 율도의 한화에너지는 다른 위험시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대규모였다. 당시 위험물 저장용량은 215만4000여킬로리터로 인천지역의 다른 위험물 저장시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두 배나 많았다. 수도권매립장 역시 시민들을 불편하게 했다. 지금도 문제가 되는 침출수 오염은, 당시엔 더 심각했다.
대규모 위험·혐오시설물 입지에 자신들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 것에 인천시민들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1995년부터 본격화한 지방자치는 이러한 불만을 폭발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인천의 최대 연대조직체인 '핵대협''핵대협'은 역사적으로 볼 때 인천 최대 연대조직체로 기억될 만큼, 대다수 지역 인사가 참여했다. 정치적 진보·보수를 떠나 다양한 정치성향의 인사가 참여했고, 이는 덕적도 주민과 함께 굴업도 핵 폐기장 저지 투쟁의 동력이 됐다.
'핵대협'은 굴업도 사진엽서를 제작해 시민들에게 배부했다. 이 엽서에는 항공 촬영한 굴업도 전경과 '굴업도는 인천 앞바다에 떠있는 보석 같은 섬입니다'라는 문구가 들어갔다.
'핵대협'은 엽서 10만장을 제작해 엽서 보내기 운동을 벌였다. 굴업도 사진을 보고 느낀 점을 엽서에 써 친지나 이웃, 연인, 스승, 제자는 물론 지방의원,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 등에게 보내게 했다. 지역의 교회, 단체 등에서 큰 호응을 얻어, 수백에서 수천 장까지 구입하겠다는 주문이 잇따르기도 했다.
당시 '핵대협' 간사를 맡았던 정희윤씨는 "정부는 굴업도가 (핵 폐기장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각종 보고서와 자료, 과학적인 근거를 전혀 설명하지 않는 등, 230만 인천시민을 무시했다. 이에 시민의 정서에 호소하기 위해 보석처럼 아름다운 굴업도 사진을 담은 엽서 보내기 운동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핵대협'의 활동은 인천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시민 수백명이 '핵대협' 사무국에 성금을 보냈다. 굴업도 엽서는 날개 돋친 듯 팔렸다. 1차로 인쇄한 10만장이 순식간에 동이나 10만장을 더 찍었다.
'핵대협'은 1995년 봄이 되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2월 25일 '굴업도 방사성폐기물 부지 선정에 관한 공개토론회'를 원자력연구소와 공동주최했으며, 정부의 핵 폐기장 지정·고시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3월 25일에는 '인천 앞바다 핵 폐기장 철회를 위한 1차 인천시민 궐기대회'를 인천시민회관 광장에서 열었다. 시민과 학생 등 2000여명이 참가했다. 이들은 집회 후 무려 3시간 동안 시내를 걸으며 대 시민 홍보에 나섰다. 집회가 끝날 때 오히려 참가 인원이 늘어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