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설
김종길
백장청규지리산이라지만 실상사는 평지에 있고 산내암자인 백장암은 산 높이 아스라이 걸려 있다. 진리 그 자체,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이 실상이라면, 백장은 그 진리를 깨친 이, 참모습을 본 이를 이름이랴.
당나라의 유명한 선승 마조 도일(馬組 道一. 709~788)의 선맥을 잇는 수제자로는 서당 지장(西堂 智藏), 백장 회해(百丈 懷海), 남전 보원(南泉 普願)을 들 수 있다. 그중 큰형격인 서당의 제자들 중에는 신라 승려인 도의, 홍척, 혜철이 있다. 이 세 사람이 신라로 돌아와 각기 구산선문을 열었는데 그중 홍척이 지리산에 연 것이 실상사이다.
결국 지리산 실상사는 마조 도일의 제자인 서당의 선풍을, 백장암은 그 이름대로 백장의 선풍을 이었으니 마조에게서 비롯된 한 몸이나 다름없다. 마조는 '경(經)은 서당이고, 선(禪)은 백장이고, 남전은 물외(物外)의 이치에 초연하다'고 했다.
▲겨울
김종길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마라.(一日不作 一日不食)"유명한 '백장청규'의 노동정신이다. 백장 스님은 기존의 율원과는 다른 선원의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새로이 선종의 규율을 엄격히 세웠다. 그 결과물이 최초의 선원 규칙인 '백장청규'이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 청규는 예부터 사찰 어디서든 받들어 행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연로한 나이에도 계속 일하는 백장을 본 제자들이 하루는 일을 못하도록 연장을 감췄다. 그러자 백장은 그날 밥을 먹지 않았다. 또 다른 날에는 백장에게 스님들이 선의 강설을 청한 적이 있었다. 백장은 "밭에서 일하고 오너라. 그 뒤에 선을 가르쳐 주마"라고 했다. 일을 끝낸 뒤 스님들이 약속을 재촉하자 백장은 양 손을 펴 보일 뿐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백장의 대설법이었던 것이다.
▲선방 가는 길
김종길
▲선방
김종길
선 생활의 기본은 '행위에 의해 배운다'는 것이다. 남들이 하찮게 여기는 밥 짓고, 나무하고, 밭 갈고, 씨 뿌리고, 탁발하는 것 등이, 모두 천한 것이 아니라 신성한 것이라고 여기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하는 것이다.
흔히 선승이라고 하면 세상을 잊어 버린 사람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선승은 무게 있고, 엄숙하고, 얼굴빛이 창백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쾌활하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로 비천한 일도 자진해서 하는 실생활을 사는 사람이다.
선은 심원한 형이상학이 아니라 실생활인 것이다. 깨달음의 길을 걸어가면서 세속적인 일상생활을 보내는 것이 바로 선이다. 일정 기간 은둔 생활을 보내고 나면 세상으로 나오는 위대한 선승들을 보게 된다. 부처 있는 곳에 머물지 않고, 부처 없는 곳에 달려가는 것이다.
붓다는 어땠을까.
▲파적
김종길
나도 밭을 간다붓다가 마가다국의 에카사라라는 마을에 있을 때 하루하루의 생활을 탁발에 의지하며 법을 설하고 있었다. 어느 날 붓다는 탁발을 나갔는데, 그 집은 바라문의 집이었다. 바라문은 자신은 밭을 갈고 씨를 뿌려서 직접 먹을 양식을 마련하고 있으니 당신도 스스로 밭을 갈고 씨를 뿌려서 자신이 먹을 양식을 마련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날을 세워 말했다. 요즈음 말로 치면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 는 비아냥거림이었다.
이에 붓다는 나도 밭을 갈고 씨 뿌려서 먹을 것을 얻고 있다고 태연히 응수했다. 이 말을 듣고 바라문은 당신이 밭 갈고 씨 뿌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무슨 소리냐며 다소 어이없어 했다. 그때 붓다는 내가 뿌리는 씨는 믿음이요, 내 보습은 지혜요, 나날이 악업을 제어하는 것은 김매는 것이요, 소를 모는 것은 정진이요, 그 수확이 감로의 열매이니 이런 것이 자신의 농사라고 말했다. 농사꾼이 땅을 갈아 농사를 짓듯이 붓다 또한 인간 정신을 계발하는 농사를 짓고 있다는 것을 '나도 밭을 간다'라고 했던 것이다.
▲설국
김종길
해 저무는 하늘가로 아스라이 구름이 깔렸다. <화엄경>에 "삶이란 한 조각 구름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 사라지는 것(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이라고 했다. 설국의 정적을 새 한 마리가 깨뜨린다. 파적. 무상이다.
가지에 얼어붙은 눈 편편이 떨어지고저무는 하늘에 솔바람 파도 소리돌 위에 지팡이 짚고 고개 돌리니눈 덮인 봉우리 높이 새가 구름 곁을 난다- 설암 추봉(1651~1706)의 <설후귀산雪後歸山>
▲백장암 삼층석탑
김종길
백장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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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의 산내 암자인 백장암은 수청산(772미터) 중턱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백장사(百丈寺)로 기록되어 있고, '수청산(水淸山)에 있다'고 단 한 줄로만 언급되어 있다. 1468년(세조 14) 실상사가 화재로 폐허가 되자 1679년(숙종 5)까지 백장암이 중심 사찰로 승격되면서 백장사가 된 것이다. 이는 당시 지리산을 유람한 이들의 기록에도 나타나는데, 대개 백장암(당시 백장사)에서 투숙을 하고 지리산을 유람했다.
양대박은 1565년 가을에 백장사에서 투숙하고 천왕봉에 올랐다. 1586년 9월 3일 다시 백장사를 찾아 하룻밤을 묵었다<두류산기행록>. 유몽인은 1611년 3월 29일 백장사에서 1박을 했다<유두류산록>. 이들은 대개 운봉현에서 인월역을 거쳐 백장사에 하룻밤을 묵은 후 지리산을 유람했던 것이다.
그러나 백장암도 1679년(숙종 5)에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 이조참판과 진주목사를 지낸 송광연(1638~1695)은 1680년 윤8월 26일 천왕봉을 내려와 군자사를 들렀다가 백장사에 이르렀다. '절(백장암)을 새로 창건하고 있는데 아직 완공되지 않아서 잠시 쉬었다가 인월역에서 숙박을 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두류록>.
실상사와 비슷한 시기에 창건된 백장암에는 국보 제10호인 삼층석탑과 보물 제40호인 석등, 보물 제420호인 백장암청동은입사향로가 있다. 백장암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기존 석탑과는 다른 '이형 석탑'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탑 전체를 두른 조각들이 장엄하고 섬세하여 바로 뒤에 있는 정교하고 단아한 석등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백장 회해(百丈 懷海: 749~814)는 당나라의 선승이다. 백장산(百丈山)에서 살았기 때문에 백장이라고 부르고 이름은 회해(懷海)이다. 초조 달마대사에서 육조혜능, 남악회양, 마조도일에 이어 제9대 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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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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