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를 포함한 흥선대원군 자손들의 묘역.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의 흥선대원군묘 옆에 있다.
김종성
만약 이우가 일본의 요구대로 정략결혼을 선택했다면, 그 후 그의 삶은 훨씬 더 편했을지 모른다. 이우가 일본을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해서 그랬는지, 일본은 그에게 험난한 삶을 강요했다. 이우를 중국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파견한 일본은, 패전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운 1945년에는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를 불러들인 것은 최후의 옥쇄(玉碎) 작전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막판에 일본은 본토라도 지킨다는 전략 하에 국내 옥쇄 작전을 전개했다. 옥처럼 부서지겠다는 심정으로 일본 땅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그 최후의 일전에 앞세울 사람 중 하나로 이우를 선택한 것이다.
소환 명령을 받은 이우는 뭔가 느낌이 이상했던지, 일본에 가기 전에 서울에 들러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그는 조선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해달라며 시일을 지연시켰다. 일본이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자, 그는 아이에게 설사약을 먹인 뒤 '아이가 아파서 출발할 수 없다'는 핑계까지 댔다.
하지만 계속 연기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이우는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때 이우와 일본정부 간에 타협된 내용이 있었다. 이우는 조선에서 근무하겠다는 요구를 철회하고, 일본은 조선과 가까운 히로시마에 이우의 근무지를 마련해준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이우는 1945년 7월 초에 서울을 떠나 히로시마에 도착했다. 이렇게 해서 히로시마 부대에 근무한 지 약 한 달 뒤인 8월 6일이었다. 이 날 아침, 그는 평소처럼 말을 타고 출근길에 나섰다.
출근 도중에 거리에서 라디오 방송 소리가 흘러나왔다. 미군 전투기 한 대가 히로시마 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내용이었다. 잠시 뒤 하늘에 그 미군 전투기가 등장했고, 전투기에서 낙하산 하나가 떨어졌다. 낙하산 끝에는 조그만 물체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잠시 뒤 굉음이 이우의 고막을 때렸고, 이우는 눈이 화끈거리고 정신이 아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의식을 잃은 그는 말에서 떨어졌다. 그날 오후 늦게 부하에 의해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다음 날 영원히 의식을 잃었다.
핵폭탄 소리와 함께 끝난 이우의 삶정략결혼을 거부하고 조선 여인과의 사랑을 택한 이우의 삶은 이렇게 미군이 투하한 핵폭탄과 함께 끝나버리고 말았다. 황태자 루돌프의 삶은 총성과 함께 끝났지만, 이우의 삶은 핵폭탄 소리와 함께 끝난 것이다.
만약 이우가 박찬주와의 결혼을 고집하지 않았다면, 이우에 대한 일본의 대우가 많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그가 힘든 싸움터에 내몰리지도 않았을 수도 있고, 그랬다면 미국의 핵폭탄과 함께 인생을 마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국판 루돌프 황태자의 사랑이 오스트리아 루돌프의 사랑보다 훨씬 더 비극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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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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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뒤통수' 친 20대 조선 왕손의 비극적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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