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하신년 기사1월1일이 되면 으레 신문에서 '근하신년' 문구를 넣었다.(1934.1.조선중앙, 왼쪽), “謹賀新年 準備에 奔忙한 京城郵便局” (1925. 12. 7. 동아일보)
이윤옥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1925년 10월 7일자에 보면 "謹賀新年 準備에 奔忙한 京城郵便局"이란 제목으로 '근하신년'이 쓰이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비참한 식민지시기에 조선에서 무슨 신나는 일이 있다고 "새해 연하장"을 돌렸을까 싶다. 우편국이 분망(奔忙)할 정도로 연하장이 쏟아져 들어 왔다면 그건 일본 앞잡이들이거나 조선 체류 중인 일본인들의 연하장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1930년 1월 1일 잡지 <별건곤> 제 25호에도 '근하신년'이 쓰이고 있다.
"謹賀新年! 여러분 過歲나 잘 하섯슴닛가. 그러나 이 인사를 쓰고 안젓는 지금은 12월 중순이다. 마튼 일을 열두 번만 하면 한 살 더 먹는 雜誌人의 억울한 생활을 이때마다 새삼스레 더 늣기지만은 그래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남보다 만흔지라 新年에 대한 『벼름』이 만흔 만큼 新年을 마지하는 기분이 결코 적지 안타.(원문 그대로 실음)" 편집실 낙서(編輯室 落書)라는 제목의 정초 풍경 기사에 "謹賀新年"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이렇듯 많이 배운 기자나 이른바 지식인들이 앞 다투어 "근하신년"을 쓰다 보니 그 말이 새해에 꼭 써야 품위가 나는 말인지 알고 너도 나도 쓰게 된 것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謹賀新年"이란 말이다.
양띠 해를 여는 새해 아침에 "근하신년"이란 말을 되새겨 보았다. 새해부터는 일본인들이 만들어 쓰는 숱한 말들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쓰는 행태를 좀 고쳤으면 좋겠다. 물론 기존에 쓰던 한자말(중국에서 유래한 말)도 우리말글로 순화해야 함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영어 따위의 외래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낱말 하나에도 우리의 얼과 정서가 깃들어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 이라는 말에 동의한다면 나의 이런 주장에 국수주의니, 어휘력이 줄어든다느니 하는 딴 지는 걸지 않을 것이다.
물론 알기 쉽고 아름다운 우리 말글을 살려 쓰는 일이 당장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또 많은 낱말은 우리말로 고쳐 쓰기가 쉽지 않은 점을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 쓰던 "망년회(忘年會, 보넨카이)"라는 말 대신 "송년모임"으로 고쳐 쓴 우리다. 송년이란 말도 결국 한자말이 아니냐고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지만 그런 시비 걸 시간이 있으면 송년을 뛰어 넘는 우리말을 생각해주길 바란다.
노견(路肩, 로카타)을 갓길로, 추월(追越, 오이코시)을 앞지르기로, 신입생(新入生, 신뉴세이)을 새내기로 바꿔 쓰면 우리말 어휘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서가 되살아나는 것'임을 알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