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리더십을 가르쳐준 박영석 대장.
연합뉴스
역시 대장이다. 2박 3일 동안 대원들과 제작진들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고민했던 부분을 단 한 마디로 정리했다. 그는 자연을 정복한다는 말을 매우 싫어한다. 자연이 잠시 길을 내주어 인간이 다니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것은 그의 오래된 철학이었고, 자연에게 배운 확고한 신념이기도 했다.
남극으로 떠난 박영석 대장과 원정대. 남극은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잔혹했다. 가장 중요한 태양을 며칠 동안 가리고 있는 구름 때문에 에너지를 모을 수가 없었다. 울퉁불퉁한 사스투르기(요철지대)를 지나면서 태양열 판이 깨지기도 했고, 곳곳의 크레바스는 대원들을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물론 가장 힘든 것은 재채기조차 얼려 버리는 극한의 추위다.
원정대의 큰 위기는 다른 곳에서 찾아왔다. 25년 만에 폭설이 내리고, 태양은 나흘 내내 구름 속에서 자취를 감췄다. 설상가상으로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 버리는 화이트아웃에 대원 한 명이 실종됐다. 원정대를 나누면 텐트를 지키는 대원도 위험하기 때문에 조심스러웠지만, 박영석 대장은 대원을 찾기 위해 화이트아웃을 뚫고 길을 나섰다. 구조대가 온다고 하더라도 기상 때문에 비행이 위험했고, 실종된 대원의 위치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수색에 어려움이 많았다.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실종 12시간 뒤. 박영석 대장은 실종된 대원을 찾아서 텐트로 복귀했다. 평소 같았으면 엄청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박영석 대장은 그 순간을 남극 원정 동안 가장 위험했던 사건으로 기억했다. 그리고 대원이 무사히 살아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했다. 그에겐 아끼는 동료들을 눈물로 산에 묻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실종된 사람은 바로 '남극을 정복하자'던 신입 대원이었다.
하얀 정글, 남극에서 벌인 41일간의 사투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극한의 추위 속에 장비는 제 역할을 못했고, 대원들은 텐트 칠 시간도 아까워 눈 위에서 쪽잠을 청해야 했다. 박영석은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 최고의 리더이자 진정한 대장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주변의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았고, 자신의 실수를 겸허히 인정할 줄도 알았다. 대학 교수직과 선거 출마 제안에는 자신의 길이 아니라며 단번에 거절했다. 무엇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한 동료들을 포기하거나 뒤로 숨는 일이 없었다.
진짜 리더, 산악인 박영석 대장<SBS스페셜> '남겨진 미래, 남극' 편을 끝으로 나는 <남자의 자격>으로 프로그램을 옮겼다. 2011년 가을, KBS 로비에서 방송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박영석 대장을 우연히 만났다. "어이, 친구!"하면서 먼저 악수를 건네는 손은 왜 그리 따뜻한지. 그동안의 안부를 묻고, 이번 안나푸르나 등정만 끝나면 남극 팀 모아 밥 한 번 먹자며 웃어 보인다.
특유의 검정 모자와 연한 색 청바지, 두꺼운 검정 패딩까지 그대로였다. 그리고 얼마 뒤 들려온 박영석 대장의 실종 소식. 우리는 박영석 대장과 대원들이 무사히 베이스캠프로 돌아올 것을 의심조차하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 무너질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안 좋다. 눈과 안개를 동반한 낙석으로 운행 중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