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당일 행적에 의혹을 제기한 일본 산케이신문 가토 다쓰야 전 서울지국장이 지난달 27일 오전 자신의 공판준비기일에 출석하기 위해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궁지에 몰린 국정원이 진보당 수사로 국면전환을 이뤄냈듯, 청와대 역시 '종북 만능키'를 써서 '비선실세'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났다. 지난 8월 <산케이신문>이 '의문의 7시간' 의혹을 제기한 후 세월호 침몰 당일 대통령의 행적에 대한 보도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검찰은 <산케이신문> 전 서울 지국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하는 무리수를 씀으로써 모든 언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반일 감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문제제기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고, 이렇게 '의문의 7시간'은 묻혀갔다.
이번에는 헌재가 절묘한 시점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대통령 측근 몇 명이 국정을 좌지우지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후 나라는 들끓었고, 대통령의 지지도는 바닥을 기고 있었다. 이때 '종북'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놀라웠을 것이다. 북한에 대해서 오직 혐오만 인정되는 사회에서 '종북숙주' 딱지가 붙은 정당을 동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고, 이렇게 '비선실세'는 묻힐 것이다.
맹목적 증오가 이성적 판단을 덮는 사회만큼 정치하기 쉬운 곳도 없다. 정치인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항상 그 위에 존재하는 '더 나쁜 놈'이 있기 때문이다. 배가 가라앉고, 은행 계좌가 털리고, 국가 기밀문서가 인터넷을 돌아다녀도, 북한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순간 모두가 책임을 벗을 수 있게 된다. 이쯤 되면 북한이 '주적'인지 '구세주'인지 헷갈린다.
새누리당은 아주 신이 났다. '민주주의'의 전매특허라도 낸 듯 의기양양하게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진보당이 해체해야 마땅할 '종북숙주'라면, 새누리당도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된다.
모두가 알듯, 진보당은 지난 정부에서 대선후보까지 낸 정당이다. 이명박 정부에 의해 대통령이 될 자격을 인정받았다는 이야기고, 이론적으로 대통령이 될 수도 있던 사람이다. 당시 여당이었던 지금의 새누리당, 국정원, 검찰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들은 현재 국가보안법으로 조사받고 있는 '위험인물'이 박근혜 후보와 나란히 앉아서 토론까지 하게 내버려 두었다.
논리와 증거 없이 억지만 있는 판결문 국정원은 이미 2010년부터 이석기 전 의원과 주변 인물들에 대해 내사를 벌여왔다고 밝힌 바 있다. 얼마 전까지도 한가롭게 내버려 두던 정당이, 왜 당장 해산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만큼 갑자기 위험해졌는가. 헌재는 진보당에 대해서는 '정당해산결정 말고는 대안이 없다'며 이렇게 주장한다.
"위법행위가 확인된 개개인에 대한 형사처벌이 가능하지만 그것만으로 정당 자체의 위헌성이 제거되지는 않으며,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언제든 그들의 위헌적 목적을 정당의 정책으로 내걸어 곧바로 실현할 수 있는 상황에 있다. 따라서 합법정당을 가장하여 국민의 세금으로 상당한 액수의 정당보조금을 받아 활동하면서 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하려는 피청구인의 고유한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정당해산결정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불법 선거자금을 탑차로 받던 정당은 해산되지 않고 '새누리당'으로 이름만 바꾸어 살아남았다. 검은 돈으로 선거결과를 떡 주무르듯 하는 것은 민주적 절차와 상관없는 일일까? 게다가 진보당의 경선부정 의혹이 터져 나왔을 당시, 새누리당도 선거명부 유출을 통한 경선부정 혐의를 받았다. 그 가망 없던 '차떼기당'이 하루아침에 '민주주의의 화신'으로 돌변할 수 있다면, 진보당이 변화해서 유권자에게 선택받거나, 변화를 거부함으로써 몰락하도록 내버려 두지 못할 까닭이 무엇인가?
헌재는 진보당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치"기 때문에 해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헌재가 판단의 이유를 찾기를 바랐다. 그러나 판결문은 "가능성이 크다," "~으로 보인다" 등의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어에 동어반복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여기에 진보당의 "유사상황에서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해산의 이유로 제시하는 대목에서는 깊은 한숨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