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내선에선 비행 시간이 5시간을 넘어가도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다. 승객이 알아서 탑승 전에 먹을 걸 사오든가(반입이 된다) 기내에서 파는 차디찬 샌드위치를 사서 먹어야 한다.
최은경
공교롭게도 비행 시간은 점심 때였다. 내 뒤에 앉아 있던 승객은 승무원을 불러 샌드위치를 주문하려 했다. 그러나 승무원은 샌드위치가 이미 동났다고 말했다. 그 승객은 "밥도 안 주면서 승객 수만큼 샌드위치를 가지고 타야 하는 게 아니냐. 샌드위치가 품절돼서 비행기 내에서 밥도 못 먹는다는 게 말이 되냐"며 엄청 화를 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그다지 크게 화를 내지 않는 미국인들의 특성상 그녀의 목소리는 굉장히 컸다. 국적이 어떠하든 누구나 배가 고프면 민감해지는 법이리라. 그런데 승객의 고함 소리에 승무원이 한 술 더 떴다(무릎따윈 꿇지 않는다!).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가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도 회사가 말을 듣지 않아요." 그러더니 아예 그 승객 옆에 앉아 대화판을 열었다.
"샌드위치가 많이 남는다고 승객 수보다 훨씬 적게 실으니 이런 일이 발생하죠. 이런 건 우리가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어요. 승객분이 제발 회사에 불만 좀 표해주세요. 제발이요.""아니. 이게 말이나 되냐고요. 승객이 배가 고픈데 어떻게 할 거요!""더 웃긴 건 뭔지 아세요? 그 샌드위치에는 우리가 먹을 분량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겁니다. 회사가 돈 아낀다고 승무원들이 비행 중에 먹을 밥도 안 줘요. 각자 알아서 싸오든가 사서 먹으라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되나요? 이 담요도 보라고요(담요를 들고 있었다). 원래 담요도 기본으로 지급했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담요도 안 나눠주고 승객이 요청해야 가져다 준다고요. 우리 일이 더 많아진 셈이에요. 샌드위치 무게 때문에 기름이 더 많이 든다고 하는데 그깟 샌드위치 무게가 얼마나 나간다고.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 됐는지."말문 터진 승무원의 말에 빠져든 승객은 자신의 허기를 잠시 잃었는지 오히려 승무원을 위로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더니 둘은 잠시 동안 아메리칸 에어라인의 최악의 서비스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이어지는 승무원의 말.
"배고프시면 저희가 땅콩이라도 좀 더 드릴게요."그 승무원이 승무원으로서 베풀 수 있는 친절은 거기까지였다. 어쩌면 그녀는 가장 연장자 승무원으로서 고객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방법을 제대로 꿰고 있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속내야 어찌하든 이 상황은 나에게 있어 굉장한 문화충격이었다.
승무원이 회사에 대해 투덜거리는 것도 그랬지만, 그보다 먼저 승무원이 승객과 마주 앉아서 마치 친구처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나로선 생경한 경험이었다. 언제나 승무원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승객은 서비스를 받는 입장 아니었나? 승무원과 승객 사이의 대화란(그걸 대화라고 한다면) "치킨이요? 소고기요?" 하면 "소고기요" 하는 수준의 것이 아니던가.
비행기 안에서 '갑을' 관계는 없다이런 미국 비행기를 타면서 얻은 깨달음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와 받는 자가 '갑을'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 내 고객 서비스 경험이 대체로 그러하다. 내 돈을 내고 서비스를 이용하지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 한국처럼 언제나 방글방글 웃고 콧소리를 내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한국의 친절도가 10이라면 미국은 한 3정도의 친절이랄까.
비록 고객을 응대하는 미소도 없고 무뚝뚝하기 그지 없지만 진심어린 안부인사와 감사를 보낸다면 그들도 미소로 화답한다. 말이 잘 풀리면 그 이상의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도 가능하다. 어느 쪽이 낫다고는 말할 수 없다. 문화적 차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무원이란 이유로 직업적 책임 이상의 요구에 마땅히 응해야 하고 과도한 친절을 베풀어야 하는 등의 감정 착취를 당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공항이나 비행기 어디에도 당신이 비행기를 타면 갑자기 '무한 갑질'을 할 수 있다고 써있지 않다. 비행기는 장거리용 교통수단일 뿐이다. 미국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오갈 때마다 승무원은 땅콩을 주면서 늘 같은 말을 한다.
"땅콩 알레르기가 있으시면 프레첼을 드릴게요.""아뇨, 땅콩 주세요."땅콩을 봉지째 받으면서 해야 하는 말도 늘 정해져 있다. "접시에 담아와라, 매뉴얼 모르냐"는 말이 아니라, "감사합니다"라는 말이다. 이 상황에선 누구도 갑이 아니고 누구도 을이 아니며 무언가를 받으면 감사를 표시하는 게 소통의 기본이다.
사건이 연일 논란을 낳고 있는 가운데 '땅콩 회항'과 관련해 16일, 국토교통부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을 검찰에 고발하고 대한항공도 운항 정지나 과징금 처분을 내리기로 했다. 그런데도 걱정은 쉬 사라지지 않는다. 남은 승무원들이 억울하게 피해를 보지 않을까 하는 걱정. 기우일까? 기우이길 바란다. 앞으로 비행기에서 작은 땅콩 봉지를 받아들 때마다 어떤 기분이 들까? 쓴 웃음이 나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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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욕하는 승무원... 조현아 부사장이 봤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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