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티 북쪽 구역에 있는 다양한 터키 상점과 음식점 모습
신희완
크로이츠베르크 지역은 오래 전부터 가난한 지역이었다. 19세기 무렵 진행된 산업화로 베를린으로 몰려든 외국인 노동자들과 늘어난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막사형 임대 주택이 대량으로 건설된 곳 중 하나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임대주택군은 심하게 파괴됐다. 이후 1964년에는 이를 철거한 뒤 새로운 건물과 새로운 도로를 건설한다는 도심 재개발 사업(Flächensanierung)이 수립됐다. 물론 당시 세워진 임대주택이 수십 년이 지나 현재 가장 사랑받는 주택이 될 것임은 예상하지 못한 채 말이다.
도심의 임대주택은 파괴됐고, 도시 외곽에는 당시 기준으로 모던한 디자인의 대단위 주거단지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외곽 주거단지 개발사업은 도심에 비해 속도가 더뎠다. 그로 인해 주택 수요가 급증했다. 개발이 느렸던 이유는, 공사 비용 절감을 위해서 한 구역를 동시에 철거하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방식으로 인해 철거 계획이 지정된 구역에는 1년 이상 방치된 빈 건물들이 다수 발생했다.
이때 저렴한 집을 찾던 이들은 '스쾃'이라고 불리는 '건물점거운동(Hausbesetzung)'을 벌이면서 주인 없이 방치된 빈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이후 경찰들은 그들을 퇴거 시켰다. 점거와 퇴거가 지속적으로 반복됐다. 1981년에 들어서는 약 160개의 주택들이 점거되기도 했다.
저항 등 다양한 사회운동의 전개로 크로이츠베르크에서의 도심 재개발 사업은 전면 중단되기에 이른다. 쇠퇴하던 철거구역은 건물점거운동 등을 거치면서 가난한 예술가와 학생 등의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도심 재개발 사업이 진행된 곳이 있었다. 전면적인 도시철거사업 계획 이전에 따로 계획을 수립해놨던 코티 일대의 개발과 코티로부터 지하철 U1로 두 정거장 떨어진 거리에 있는 메링 광장(Mehringplatz) 일대의 개발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은 이 지역의 잔혹한 개발을 목격했기에 이후 동일한 방식으로 이뤄질 도심재생사업에 반대하고 저항하면서 사업을 저지했다.
참고로 약 80채를 점거했던 주택점거자들은 시 당국과 임대인간 협상을 통해 정식계약을 맺고, 지금까지 지역 혹은 동네의 정치적 혹은 문화적 거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외의 점거자들은 차례로 퇴거했고, 그들 중 소수는 끝까지 법적 테두리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며 정식 계약 제안을 포기한 채 끝까지 저항하다 퇴거당하기도 했다. 코티는 당시 이런 건물 점거운동뿐만 아니라 전면 철거를 통한 도시 개발에 대한 저항 그리고 각종 사회·문화운동의 중심지의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