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가로막는 어버이연합<2014인권콘서트>가 열리는 11일 오후 서울 광진구 세종대 정문 앞에서 어버이연합회원들이 콘서트 개최를 반대하며 집회를 벌이던 중 지나가던 시민들의 통행을 방해하고 있다.
이희훈
문제는 우리다. 그들 스스로의 성찰과 반성, 재발방지를 기대하는 것이 허무한 일이라면, 그들의 자제력을, 국가기관의 중립적 통제력을 강제해 낼 힘이 과연 우리에게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배제와 섬멸의 논리가 단지 극우·보수세력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북프레임이 단지 극우·보수 세력의 담론에 머물지 않고 '국민적 프레임'으로 확장된 것은 이 담론이 진보블록에서 생산되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그들이 백색테러를 정당화한 것은 아니지만, 종북척결 논리에 대한 진보 일각의 공조는 백색테러를 불러온 배제와 섬멸의 논리를 합리화·정당화하는데 크게 일조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 노골화된 종북 척결의 광기에 편승한 언론이나 일부 지식인들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대규모 공안사건의 고비마다 넘실댔던 종북사냥의 광기 앞에 자제력과 합리적 이성을 요구했던 이들은 극소수였고, 대부분은 광기에 편승하거나 거리두기에 바빴다. 이런 저런 이해관계로 인해, 이런 저런 호불호로 인해 종북사회 전면화에 제대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사회가 내부의 적(enemy)으로 규정된 이들을 반대자(adversary)로 구별하고, 대립진영을 파괴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정당성을 용인해야할 대상으로 고려하도록 만드는데 별다른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 대부분은 관망했다. 그 결과 인명살상을 예고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이들이 무한한 자긍심과 떳떳함을 내면화하고, 아무런 통제 없이 비공식적 폭력이 떳떳하게 칭송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해방이후 이 나라의 반공독재체제의 근간을 이루었던 백색테러가 다시 재현되지 않으려면, 그들의 이성회복이나 성찰, 스스로의 혁신, 국가권력의 중립성과 엄정함을 요구만 할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역시 이 끔찍하고 유치한 종북사회의 형성에, 칼 슈미트식 이분법적 민주주의의 부활에 기여한 바가 없는지, 의도하지 않게 그들의 합리화에, 정당화에 기여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반인권적인 인권운동가들에게 또 다른 인권도 있음을, 억압적인 자유주의자들에게 또 다른 자유도 있음을, 폭력적인 평화주의자들에게 다른 평화도 가능함을 보여줘야 한다. 배제와 섬멸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의 어울림이 더 좋은 사회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서 배제의 논리와 백색테러에 대한 우리의 대안은 성찰과 연대를 통해 우리부터 종북사회의 늪에서 벗어나는 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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