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 막아선 동성애 반대자들인권헌장을 지지하는 성소수자들이 서울시민인권헌장(안) 공청회를 앞둔 11월 20일 오후 서울 특별시청 후생관에서 인권헌장 반대자들에게 둘러싸여 소리치고 있다. 이들은 "저희는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렌스젠더입니다. 서울시민입니다. 성적소수자 인권은 인권헌장에서 존중 받아야 합니다.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고 주장했다.
이희훈
박원순 시장님. 시장님이 인권 변호사 출신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국내에 '성희롱'의 개념조차 불분명하던 시기에 '서울대 신교수 성희롱' 사건에서 피해자인 조교의 변호를 맡았다고 들었습니다. 여성은 수동적인 성적 대상으로만 여겨지던 시대에, 당시 시장님이 한 일은 인권 운동의 역사에 큰 귀감이 되었다고도 들었습니다(관련 기사 :
성희롱 사건 변호하던 박원순, 왜 사라졌나).
그런데 웬일인가요? 서울시민인권헌장과 관련된 논란에 있어서는 시장님은 마치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유독 '성소수자'와 관련된 조항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보수·종교단체도 그렇지만, 편견과 혐오를 드러내는 그들의 발언에 박 시장님은 여전히 침묵 중이네요.
심지어 인권헌장이 좌초될 위기에 놓였는데도 뚜렷한 입장을 드러내지 않는 시장님의 행보에 고개가 갸우뚱합니다. 인권이 만장일치의 합의가 이루어져야 효력이 생기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 누구나 똑같이 정체성을 인정 받고, 차별받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인권 변호사 출신인 시장님에게 감히 제가 이런 말을 드리는 것조차도 부끄러울 지경이니까요.
현재 미국에서는 많은 주가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는 점차 늘어가고,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도 성소수자의 권리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유럽에서도 확대되고 있으며, 반기문 UN 사무총장도 공식적으로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양성애자), 트랜스젠더)' 지지선언을 한 바 있습니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동성결혼 합법화에 미치지도 않는,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항을 통과 시키는 일도 버겁습니다. 출신 지역과 성별, 피부색 등과 더불어 '성적 취향'도 인간의 정체성으로 인정하는 과정이 이리도 힘이 듭니다. 한 사람의 행동이나 발언이 아닌,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특성을 두고 차별하지 말자는, 단순하고도 중요한 약속이 혐오라는 감정에 부딪혀서 무산될 위기에 처한 셈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박원순 서울시장님은 어째서, 인권헌장의 침몰을 그저 보고만 있는 것인지요? 시장님의 정치적 입지 때문입니까? 국내에서 종교단체의 반발을 사는 것이 두려운 것인가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저는 박 시장님의 침묵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트위터 소통 행정'을 자랑으로 삼던 것도 무색할 만큼, 논란이 커진 뒤에는 트위터에서도 시민들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말을 아끼시더군요.
게다가 지난 2일, <기독신문>은 전날인 1일 박원순 시장님이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임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시장님은 "성전환자에 대한 보편적인 차별은 금지되어야 한다"면서도 (서울시장으로서) 동성애는 확실히 지지하지 않는다고 거듭 밝혔다고 합니다(이에 대해 서울시 대변인은 "보도 내용이 맞다"고 언론에 밝혔습니다). 인권변호사 출신인 시장님이 개인의 성향을, 타인이 찬성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발언을 한 것을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지 심히 당황스럽습니다.
공약이었던 인권헌장, 반대가 부담스럽나요?만약 직접적으로 성소수자를 대변하는 일이 부담스러웠다면, '헌법 11조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말하기만 했더라도 좋았을 텐데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던 그 조항 말입니다.
"이미 헌법에 있는데 왜 인권헌장에 또 조항을 만드려고 하느냐"는 주장에는, 오히려 피켓을 들고 동성애 혐오를 조장하는 사람들이 직접 근거가 되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서울시청 광장에서, 확성기를 들고 "동성애는 인권이 아닙니다"라거나 "동성애자는 치료(1970년대 미국정신과의사협회는 '동성애는 질환이 아니다'라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를 받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식의 발언들 말입니다. 특정인의 정체성과 존재 자체를 '잘못된 상태'로 부정하는, 이런 차별이 만연한 것을 시청 앞에서 보시고도 시장님은 어찌 침묵하십니까?
반대 여론이 두렵나요? 서울시민인권헌장은 다름 아닌 박 시장님의 공약이었습니다. 인권보호를 위해 추진된 사안이 극단적인 반대 세력에 의해 이리도 간단히 무산된다면, 보수진영에게는 '몰려가서 떼쓰니 먹힌다'는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더군다나 정당한 근거를 토대로 한 의견이 아닌, 편견과 부정적 감정의 표출은 수긍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4개월간 시민위원 180명으로 구성된 시민위원회가 다수의 회의를 거쳐서 만든 결과물이 이리 쉽게 휴지조각처럼 버려지다니요. 시장님의 공약이, 시민들의 평등한 삶이, 혐오의 목소리에 꺾여서야 되겠습니까?
차별을 막고, 평등한 서울을 만들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