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의 전경이 두만강과 압록강은 수 많은 독립투사를 만주지방으로 건너게 하였으며,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이 강들을 도강하였다. 해방 후 중국내 해외동포가 귀국하느라 이 강들이 하얗게 뒤덮였다고 한다.
신민구
정든 고향을 등지고 항일 독립 투쟁하러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간 열사들의 모습이 두만강 뗏목타기를 하면서 더욱 선연히 보였다. 이 열사들은 <독립군가>를 목청껏 부르면서 항일 자주독립투쟁을 하였으리라. 마치 프랑스 혁명시절 외세 연합군들에 맞서 자신과 가족 그리고 혁명이념을 사수하기 위해서 출전한 <라마르세예즈>과 같은 마음과 의지였으리라.
<독립군가>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삼천리 삼천만의 우리동포들건질 이 너와 나로다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싸우러 나가세선현들의 항일 자주독립투쟁이 지금이라도 헛되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남북7천만. 해외동포 800만이 주체가 되어서 서로 하나되어 공생. 번영하는 찾아가는 길을 모색해야 되지 않을까?
조선족 이민사는 다음과 같다. 연변지역은 여덟게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연변 수도인 용길, 왕청현, 용정, 청산리 대첩에 빛나는 화용시, 안도현, 대조영 때 수도인 도나시 등이다.
연변대학의 교수도 이민사를 말해주었지만 40대 중반의 안내원도 거의 비슷하게 말해주었다. 안내원의 이야기로는 어릴 적 한족에게 고구려 뭉둥이이라 업신여기고 심지어는 쳐다 본다고 싸운 적도 있었단다. 조상의 고향은 수원인데 안내원의 고향은 연길이다. 그래서 우리말을 지키고 사용하고 있음을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왠지 가슴 한구석 쓰려오면서 울컥한 것이 올라왔다. 경계인으로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제1차 이주민은 1620~1977년까지인 명 말에서 청초인 시기이다. 이 때 쓰러져가는 명을 돕기 위해서 후금과 전쟁하기 위해서 간 군인들 중 1만여 명일 살다. 이후 정묘호란·병자호란 과정에서 포로들도 포함된다.
이때는 자신의 성도 사용하지 못했다. 박(朴)는 그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목(木)은 제외하고 복(卜)만 사용하였단다. 그래서 화북 복씨성은 이렇게 탄생되었다. 민족언어나 민속 등은 거의 소멸하고 단지 고구려 후손인 것만 자각하고 있다. 물론 소쿠리 등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제2차 이주민은 1677~1885년까지이다. 이 시기는 생계수단으로 이주하였다. 조선땅에서 여러 차례 수재를 당하여 농민들의 관심사는 두만강을 잘 건너가는 것이었다. 간도라는 말은 두만강의 퇴적물이 쌓여서 모래톱이 생겨서 두만강이 갈라지는데 이 곳이 간도이다. 국경을 지키는 군인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이 간도에 갔다 왔다 하면서 자유로이 농사지으면서 오가게 되었다.
제3차 이주민은 1885~1905년이다. 이 시기는 청나라의 이민 실변 정책결과이다. 중국 내륙 북쪽을 개간하면 조선인들에게 황소도 주고 세금도 안내는 조건으로 70~80만 명 정도가 이주하였단다. 청나라의 누르하치는 백두산 인근에서 모친이 낳았기에 신성시하였다.
제4차 이주민은 1905~1931년이다. 이 시기는 조선의 식민지 시기로 피눈물에 의한 정치적 이주이다. 특히 1919년 3월 1일 운동 이후는 더욱 그러하였다. 1906년 용정에 헤이그 밀사 3인 중 한 사람인 이상설이 세운 서전서숙은 간도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이었고 서전서숙의 설립으로 연변 일대의 교육구국운동이 시작되었다.
연변에서도 서전서숙의 설립은 반일운동의 발단이었으며 서전서숙의 설립을 계기로 각지에서 사립학교설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후에 독립투사들이 건너오게 되었다. 독립운동 근거지는 대략 3년을 넘기지 못한단다. 반역자의 밀고로 인해서.
제5차 이주민은 1931~1945년 8월 15일 까지이다. 조선땅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대거 만주지역으로 옮기는 강제이주이다. 조선인들에게 넓은 만주 땅에서 옥수수를 기르고 유목을 할 수 있다는 유혹으로 연길이 아닌 흑룡성과 요녕성으로 이주시키다. 대략 220만 명이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해방일을 맞이하여 160만 명 정도가 고국인 땅으로 돌아오다. 연변 이주민은 다수가 북측 땅으로, 요녕성 등은 남쪽으로 귀국하였다. 건너가는 숫자가 많아서 두만강과 압록강이 하얗게 뒤덮을 정도였단다. 그 외 이주민은 자신이 개간한 땅이 아쉬워서 그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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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에 몸담으면서 교사.교육활동은 현장단위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구조에서도 변혁이 되어야만 참교육에 이른다고 봅니다.그래서 짧은 소견을 대중적인 전자공간을 담보하고 있는 오마이뉴스를 통해 전달하고 합니다. 저서로 [자본론노트],[청소년을위한백두선생경제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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