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종교> 표지
인물과사상사
그러나 대한민국의 종교는 어찌된 일인지 기득권자들의 대변자 역할을 하고 있다. 아니 좀 더 엄밀히 말하면, 기득권을 누리려고 온갖 추태를 벌이고 있다. 항상 권력 옆에는 종교가 있다. 특히 대통령 주변에는 종교가 그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그 해괴함을 파헤친 책이 있다. 백중현의 <대통령과 종교>가 그것이다. 저자 백중현은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종교전문기자로 활동하며 '종교와 사회문제', '종교와 권력'에 관심을 갖고 글을 써 온 기자다. 이 책에서 대통령과 종교, 특히 개신교와 대통령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책에는 불교나 가톨릭의 권력에 관한 내용이 없는 건 아니지만 개신교에 대한 기록이 많다. 나도 개신교 목사이니 가톨릭이나 불교를 다루기보다 개신교에 대해서만 글을 쓰려고 한다. 이미 대한민국의 개신교는 '개독교' 소리를 듣고 있다. 모든 교회와 목사가 다 그렇다는 얘긴 아니다. 그러나 싸잡아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많다.
심지어는 구원파 유병언이 한참 언론에 보도될 때도 "개독교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들이 많았다. 정통교회에서 이단이라고 아무리 발뺌을 해도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 이렇게까지 개신교의 신뢰성이 땅으로 내동댕이쳐졌을까. 개신교가 기득권자의 대변인이 되고 더 나아가 기득권자가 됨으로 '개독교화'하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탄생부터 개신교는 태생적으로 기득권화로 시작했다. 이승만 정권의 등장은 곧 개신교의 정권 창출이었다. 독실한 개신교인이며 개신교 장로였던 그는 노골적으로 기독교 국가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미국은 '기독교'와 '친미'라는 자신들의 입맛에 부합되는 인물로 이승만을 내세웠다.
"이승만은 한국을 개신교 국가처럼 운영했다. 그는 첫 국회인 제헌의회를 기도로 시작하고 대통령 취임식 석상에서도 자신의 종교성향을 자주 드러냈다. (중략) 이어 이승만은 제헌의회 의원이자 감리교 목사인 이윤영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당시 이 기도는 모든 의원이 기립한 가운데 진행되었다고 한다."(39쪽)이승만 정부는 21개 부서장 가운데 9명이 개신교 신자였다. 국회도 입법의원 90명 중 21명이 신자였다. 이렇게 시작된 대한민국은 그 이후에도 김영삼, 이명박 장로 대통령을 배출했다. 그럴 때마다 '종교편향'이란 단어가 언론을 채웠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은 군목제도에 불교와 가톨릭을 배분하는 등 개신교로서는 기득권을 많이 잃은 정권이었다.
보수 개신교, '반공'과 '친미'로 권력의 중심에 서다박정희 대통령 때가 개신교는 가장 부흥한 시기다. 대부분의 대형교회들이 이때 등장했다. 당시 교회는 '반공'이나 '친미'가 교리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박정희 정권은 이런 개신교의 움직임을 십분 활용한 정권이었다. 보수 개신교의 반공 이데올로기와 친미성향은 박정희 정권의 취약성을 극복하는 데 적잖이 기여했다.
"정권의 기반이 취약했던 박정희는 정권 유지를 위해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지해야 했고, 또 미국 등 국제사회의 지지도 필요했다. (중략) 당시 이를 지원할 수 있는 민간 세력은 개신교가 유일했다."(78~79쪽)박정희의 요구와 개신교의 가교 역할이 맞아떨어졌다. 개신교 지도자들은 미국 선교사들과의 인맥을 동원하여 박정희를 도왔다. 박정희와 보수 개신교의 밀월관계는 점점 더 짙어졌다. 심지어는 1972년 긴급조치로 민주인사들이 투옥될 때도 구국기도회를 열어 박정희를 지원했다. 월남파병도 개신교가 '자유의 십자군' 운운하며 나서서 찬성했다.
이때 개신교의 대형집회들이 여의도광장에서 자주 열린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정권의 비호가 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새벽기도와 새마을운동은 그야말로 천생 궁합이었다. 조찬기도회도 이때 생겼다. 그러나 개신교는 반독재 운동과 목요기도회를 중심으로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기도 했다. 이렇게 권력을 두고 보수 기독교와 진보 기독교가 갈리기 시작한 것이 박정희 정권 때이다.
전두환 정권 때는 기독교방송에 대해 뉴스를 못하도록 하는 등 탄압이 가해졌다. 그러나 전두환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여는 등 보수 개신교는 여전히 정권의 시녀 노릇을 했다. 차라리 '10·27 법난'을 겪는 등 불교계는 수난을 당했다. 천주교는 이때 가장 대형집회를 많이 열었다.
개신교, '개독교'란 말을 듣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