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교는 처음으로 금호강에 다리를 놓아(그것도 사비로) 영남대로를 걸어 서울로 가는 수많은 경상도 사람들이 옷을 벗지 않고도 강을 건널 수 있게 했다. 이서는 해마다 홍수로 고통받는 대구사람들을 위해 사비를 들여 물길을 바꾸었다. 그러나 대구 북구 팔달교 옆 서유교 비(왼쪽)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은 듯 놓여 있고, 대구 수성구 상동 이서공원에는 '이서 공원' 표지석도 없다.
정만진
대구에도 이런 사례가 있다. 서유교(徐有喬)와 이서(李漵)에 관한 푸대접이 바로 그것이다. 서유교는 부산, 대구 등 경상도 사람들이 영남대로를 통해 한양에 가려면 반드시 건너야 하는 금호강에 사상 최초로 돌다리를 놓은 인물이다. 그것도 사비를 들여서 그렇게 했다. 서유교 덕분에 경상도 선비와 상인들은 처음으로 옷을 벗지 않고도 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다.
서유교는 1849년부터 1851년까지 2년 동안 대구판관으로 재임했다. 하지만 서유교의 공로를 기리는 조그마한 비석은 그가 다리를 설치했던 곳 인근의 팔달교 아래에 숨은 듯 놓여 있다. 팔달교 입구의 넓은 잔디밭은 거대한 '바르게 살자' 비석이 차지하고 있고, <判官徐有喬永世不忘碑(판관서유교영세불망비)>는 '바르게 살자' 뒤편 비탈진 기슭에, 그것도 잡목들로 접근로가 가려진 곳에 일부러 감추기라도 한 양 외로이 서 있다. 그 탓에, 웬만한 답사자는 현장에 가서도 비석을 찾기가 어렵다. 게다가 서유교영세불망비가 왜 이 곳에 세워져 있는지에 대한 안내판도 없다.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맹세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서 또한 그에 못지않게 홀대받고 있다. 이서는 대구판관으로 일하던 1776년, 대구 사람들이 해마다 겪는 홍수로 큰 피해를 입는 것을 보고 역시 서유교처럼 사비를 들어 물길을 바꾸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기려 비를 세웠다. 하지만 그 비는 현재 엉뚱한 곳으로 옮겨져 있고, 비석 둘레에 꾸며진 상동교 옆의 소공원 입구에는 이서에 관한 안내판 대신 '바르게 살자'는 빗돌이 눈에 두드러지는 목을 차지한 채 번쩍이고 있다.
배설, 서유교, 이서 모두 잊혀진 이름게다가 배설은 '잊혀진 이름' 정도에서 그치지도 않았다. 영화 <명량>은 명량해전에 참군하지도 않은 배설을 왜와 내통한 첩자로서 이순신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자 도주하다가 아군의 화살에 맞아 죽은 인물로 그렸다. 서사구조상 그런 반동(反動)인물의 배치가 꼭 필요했더라도 가공의 장수를 한 명 등장시켰으면 될 일인데, <명량>은 굳이 역사의 실존인물을 극단적으로 왜곡함으로써 배설을 '두 번 죽이는' 잘못을 저질렀다. 산성을 중수하고 칠정구택을 준설하는 공로를 세우고도 정작 금오산성에서는 잊혀진 배설이 <명량>을 통해 터무니없는 악역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루빨리 구미시는 금오산 내의 각종 안내판에 배설의 이름을 밝혀두어야 한다. 배설이 금오산성을 중수한 일은 개인의 문집도 아닌, 엄연한 국가기록물 <조선왕조실록>에 적혀 있는 역사적 사실 아닌가! 자라나는 아이들이 전국 곳곳의 역사유적지 안내판을 보면서 "나도 저런 인물이 되어야지!"하고 생각하도록 준비하는 일, 그것은 우리 기성사회 성인들 본연의 책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