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경로>조선통신사 역사관
조선통신사는 도쿠가와 막부의 경사나 쇼군 계승이 있을 때 방문했으며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고 도쿠가와 쇼군의 답서를 받았다. 통신사의 총책임자로 국서를 받들고 가는 정사 외에 조선통신사에는 막부의 요청으로 특별히 파견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의원, 영원, 마상재인으로 지금의 의사, 화가, 서커스의 기예단원이다.
영원들은 통신사가 가는 곳의 정경이나 의례 장면을 그렸는데 달마도로 유명한 화가 김명국은 그림을 요청하는 일본인의 수가 너무 많아 팔이 아파 울 지경이었다고 한다.
마상재는 본래 임진왜란 때 시작된 것으로 기병들이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무예다. 일본인들이 "조선국의 마상재는 실로 절묘하고 기묘한 기예다"며 놀라워 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류는 이미 이때부터 시작이 된 셈이다.
노략질하는 왜구들을 합법적인 교역의 대상으로참가자들은 일본인들과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 설치했던, 왜관을 둘러보기 전에 우선 부산박물관으로 향했다. 부산박물관에는 왜관은 물론, 조선통신사에 대해서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전시물들이 많이 있었다.
왜관은 일본인이 조선에 와서 통상(通商)하던 곳이다. 행정기관을 이르기도 하며, 일본인의 집단 거주지이기도 하다. 조선은 태종 때부터 왜관을 여러 곳에 설치했는데, 해안가에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합법적인 교역의 대상으로 끌어들여 무역을 장려하고 왜구로 인한 폐해를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부산포, 내이포(진해), 염포(울산)에 있던 (삼포) 왜관은 삼포왜란 등을 겪는 등 말썽이 많았다. 임진왜란 전에는 부산포에만 왜관을 두는 단일 왜관제도가 운영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관은 완전히 폐쇄된다. 임진왜란 후 1607년 국교가 재개되면서 부산포에 다시 왜관이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두모포(현 부산 동구청 부근)에 왜관이 들어섰다가 점차 교역량이 늘어나고 두모포 포구의 수심이 얕고 배를 정박하기에 협소하자 1678년 초량(현 부산 용두산공원 부근)에 신관을 지어 초량왜관으로 옮겼다. 조선과 교역을 원하는 일인들은 모든 업무를 초량왜관에서만 처리하도록 엄격히 규율되었다.
그 때문에 초량왜관은 조일간 교역이 늘어나면서 점차 내부 시설이 넓어지고 규모가 확대되어 부지면적이 11만 평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초량왜관은 높이 6자, 둘레 1273보의 돌담으로 읍성처럼 쌓았고 일인들이 담을 넘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6개의 감시 초소를 두어 지켰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 공사관이 초량왜관에 설치되었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의 거주지와 교역은 초량왜관에 한정되지 않게 된다.
부산박물관 경내에는 당시 초량왜관에 대한 조선의 통제와 감시 정도를 잘 보여주는 약조제찰비(約條制札婢)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