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결혼식의 절차를 담은 그림. 강원도 강릉시 오죽헌에 있는 향토민속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싱글들에게 혼수비용 명목으로 쌀과 콩 지급1485년부터 시행된 법전에 이런 규정이 있다고 해서, 이 규정이 그때 처음으로 시행된 것은 아니다. <경국대전>은 종래의 성문법과 관습법을 총망라한 법이었다. 그러므로 <경국대전>에 규정된 법규의 상당부분은 그 이전부터 시행된 것이었다.
정부의 싱글 대책이 그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점은, <경국대전> 시행 이전에 정부가 싱글들을 지원한 사례에서 확인된다. 일례로, 성종 3년 5월 7일자(양력 1472년 6월 14일자) <성종실록>에서는 정부가 가난한 노처녀들에게 혼수비용을 지급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군주들이 싱글 대책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는 연산군 2년 4월 29일자(1496년 6월 10일자) <연산군일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결혼 못한 노총각·노처녀들이 많으니 대책을 세우시라'는 신하들의 건의를 연산군이 받아들이는 장면이 나온다. 연산군 같은 왕도 싱글 대책을 중요시했다면 다른 군주들이 어떻게 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럼, 정부는 어떤 식으로 싱글들을 도왔을까? 위의 <성종실록>에 따르면, 정부는 싱글들에게 혼수비용 명목으로 쌀과 콩을 지급했다. 상평통보가 유통되기 이전인 17세기 중반 이전만 해도 쌀과 옷감이 화폐 역할을 했다. 따라서 혼수비용으로 쌀을 지원했다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현금을 지급한 것과 마찬가지다. 결혼 적령기를 넘긴 싱글들의 은행계좌로 정부가 입금을 해준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은 국가가 싱글 문제를 국가경제적인 문제로 파악했음을 보여준다. 만약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로 파악했다면, 싱글들에게 결혼을 독려하거나 이들에게 세제상의 불이익을 주는 차원에서 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국고를 열어 결혼자금을 지원했다는 것은 '국가가 경제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가난하게 됐고, 이 때문에 백성들이 결혼을 하지 못했다'고 판단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국가로부터 이 같은 지원을 받는 연령은, 여성의 경우는 원칙상 20세 이상, 남성의 경우는 원칙상 30세 이상이었다. 이것은 결혼 적령기에 관한 전통적인 관념에 따른 것이었다. 아동용 유교 교재인 <소학>의 해설서인 <소학집주>에 따르면, 여자는 20세, 남자는 30세에 결혼하는 것이 이상적이었다. 이것은 스무 살이 넘으면 노처녀, 서른 살이 넘으면 노총각으로 간주되었음을 의미한다.
싱글대책을 위해 국고를 연 과거 정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