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익 전 동아투위 위원장
이영광
-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한 지 지난 10월 24일로 40주년을 맞았는데 느낌이 어떠세요?"어릴 때 '일제 36년'하면 엄청나게 긴 세월로 느꼈는데 우리가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한 지가 벌써 40년이 넘었다니 세월이 빠름을 새삼스레 느끼고 있습니다. 그때가 박정희 유신독재정권 시절이었는데 그의 딸이 집권한 요즘 언론 상황이 그때와 유사해요. 그래서 착잡한 심정입니다.
요즘 '신(新) 유신언론시대로 접어들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언론들이 국민들로부터 지탄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40년 동안 헛고생을 한 것은 아닌지 회의감마저 들 때가 있습니다."
- 어떤 점이 비슷한 것 같나요?"지금 언론이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서 제 역할을 못하고 있어요. 세월호만 하더라도 생때같은 아이들을 잃은 유가족과 안전 사회를 바라는 국민들의 입장에서 보도를 해야 하는데,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시키는 데에 언론들이 앞장서고 있어요. 또 이명박 정부에서 해직 언론인이 여러 명 나왔는데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죠.
현재 방송사들은 청와대 낙하산 인사가 장악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방송이 전혀 제 구실을 못하고 있어요. 신문은 신문대로 족벌 사주들이 인사권과 편집권을 틀어쥐고 좌지우지하고 있기 때문에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하죠. 유신정권 시절이나 지금이나 주류 언론들이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하고 있는 점에서 비슷해요."
- 1970년대 언론은 어땠나요?"그때는 유신 독재정권 시절이기 때문에 언론탄압이 극심했어요. 지금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원들이 매일 언론사에 상주하다시피 하고 신문과 방송 제작을 일일이 통제했어요. 그 당시엔 학생 데모, 종교인 기도회, 인권, 노동운동 등의 기사는 싣지도 못하게 했고 야당 당수가 기자회견 하면 사진도 못 싣도록 시시콜콜한 것까지 지시를 내렸어요.
사당동 달동네 연탄 값이 시내보다 비싸다는 기사를 쓴 기자가 계급투쟁을 선동했다고 붙들려가 매를 맞기도 할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언론탄압을 했어요. 그러나 그때만 하더라도 국민들은 언론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언론인들을 적극적으로 응원하고 격려하는 분위기였죠. 그래서 싸우기가 훨씬 쉬웠죠.
하지만 지금은 아주 지능적이고 교활해요. 사주들을 통해 언론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언론 종사자들은 정권과 싸우기 전에 사주와 싸워야 해요. 그러나 사주는 인사권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래서 사주에게 밉게 보이면 쫓겨나거나 정직 처분 등 불이익을 당해서 예전보다 싸우기가 훨씬 어려워요."
- 20~30대들은 '자유언론 실천선언'에 대해 대부분 잘 모르는데, 간략하게 설명해 주세요."앞서도 말했지만 1970년대 박정희 유신 독재정권 시절, 언론탄압이 극심했습니다. 당시 언론은 언론이기를 포기하고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했습니다. 그러자 대학생들이 회사 앞 광화문 네거리에서 이것도 신문이냐며 동아일보 화형식을 갖고, 구속 학생 학부모들이 기자들이 취재 나가면 멱살을 잡고 '취재해도 쓰지도 못하는 기자들이 무슨 기자냐'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라는 팻말까지 등장할 정도였습니다.
참다못한 기자들은 1974년 10월 24일 역사적인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그 전날 무슨 일이 있었냐면 서울농대생 300명이 데모한 기사를 실었다고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담당부장들이 연행됐습니다. 이에 기자들은 모두 퇴근하지 않고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밤샘 농성을 했어요. 그리고 24일 편집국에 모여서 '자유언론은 본질적으로 바로 우리 언론 종사자들의 실천 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 받거나 대중이 찾아다 쥐어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 언론인이 스스로 쟁취해야 할 과제다'라고 선언하고 3개항을 결의했습니다.
첫째, 어떠한 외부 간섭도 일치된 단결로 엄격히 배제한다. 둘째, 기관원 출입을 엄격히 배제한다. 셋째, 언론인의 불법연행을 거부하며 불법연행될 경우 그가 귀사할 때까지 퇴근하지 아니한다. 이날 이후 기관원들이 회사에 출입하지 못했고 그동안 실리지 못했던 학생 데모, 종교계의 인권회복 기도회, 민청학련, 인혁당 고문 조작사건들이 보도되기 시작했습니다."
"'동아일보 쓰레기' 구호 들으면 가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