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일상사로 가슴 졸이다가 웃음이 '빵' 터져

[서평] <꽃 피는 것들은 죄다 년이여> 산문집으로 돌아온 시인 박경희

등록 2014.11.05 10:35수정 2014.11.05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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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못하고 죽은 구신이 붙었나, 방언이 터졌나. 왜 자꾸 지랄이여! 모가지 빼고 주둥아리 나불거리니 새벽이 와도 온 줄 모르지? 오줌 찔끔거려도 그것이 오줌 지린 것인지, 침 튀긴 것인지 모르지, 잉? 시계불알이 지 불알인지, 넘 불알인지 정신이 왔다 갔다 허지? 그러니께 이렇게 지랄이지. 안 그러면 해장부터 지 어미한테 지랄허겄어!" (본문중)

 <꽃 피는 것들은 죄다 년이여> 책 표지.
<꽃 피는 것들은 죄다 년이여> 책 표지.김용만
사실 처음 이 책을 골라서 중간 부분을 펴서 읽었을 때는 소설인 줄 알았습니다. 워낙 구수하고, 구수하다 못해 너무나 적나라한(?) 욕과 사투리, 호러 소설인줄 알았네요. 하지만 집에 와서 읽다보니 왠지 욕이 많이 나오고 평범한 일상사지만 너무나 따뜻한 책이었습니다.


시인 박경희씨는 2001년 '시안'으로 등단하고 2012년 '벚꽃 문신'이라는 시집을 처음 내었던 분입니다. '벚꽃 문신'은 습작을 한 지 19년 만에 낸 시집입니다. 그 후 2년 만에 이렇게 재미있지만 짠한 산문집으로 세상과 다시 만났습니다.

내용은 단순합니다. 시집을 못 간 것이 아니고 안 간 시인이, 어머니와 같이 살며 일어나는 일상사를 사실 그대로 옮긴 책입니다. 어찌나 사실 그대로인지, 두 분이 싸우는 상황이 바로 옆방에서 일어나는 것 처럼 생생합니다.

"주둥이 다물라니까 입이 나와서 안 다물어지지? 에라이, 이거나 처먹어라!"

내 얼굴에 대고 뀐 방귀 냄새가 얼마나 독하던지, 한참을 혼미해진 정신이 돌아올 생각도 아니하고 어안이 벙벙하여 이것이 호미인지, 곡괭이인지 헷갈리는 지경까지 오고 갔다." (본문중)

엄마와 함께 사는 시인은(책에서는 시인이라는 말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주로 '~년'으로 불립니다.) 엄마의 끊임없는 구박과 설움을 받습니다. 주 내용은 하나입니다. '시집 안 가냐?'입니다. 시인은 시집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엄마와 사는 것이 화가 나고 더러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엄니가 없으면 못 살 것 같습니다. 두 여자가 한 집에 살며 갖은 구박을 하면서도 왠지 짠한 감동적인 책입니다.


엄마는 새벽에 마스크 팩을 한 딸을 보고 기겁하기도 하고, 꽃게를 비싸게 샀다고 열을 내시기도 합니다. 드라마를 보시며 온갖 쌍욕을 하시고, 컴퓨터로 맞고를 치시면서도 손으로 치는 것인지 입으로 치시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욕을 합니다. 함께 생활할 땐 시집 안 간다고 온갖 구박을 하는 엄마도 속마음은 그것이 아닙니다.

"너 읎었으믄 지금 이렇게 웃기나 했을까 모르겄다. 아비 몫까지 하느라 욕보는디, 아가, 고맙다."


어둠 속 그 누구도 아니고 자는 척하는 내게 조용히 이야기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 꼼지락거리라고 마음의 대문을 두드리는 주먹질이 멈추었다. 순간 숨까지 멈춰 버렸다. (본문중)

시인은 따로 살다가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신 뒤 혼자 계실 엄마가 적적하실까봐 엄마 곁으로 옵니다. 엄마는 천식이 있어서 걱정도 많이 되었습니다. 엄마와 싸워가면서도 내심 엄마에 대한 걱정이 끊이지 않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간 엄마가 소리가 없다. 지금이야 많이 좋아졌지만, 천식으로 한번씩 가슴 부여잡고 호흡 곤란이 와서 사람 혼을 어지간히 빼놨다... 엄니가 없으면 소리 높여 부른다. 그러면 어디서든 엄미는 내 목소리보다 더 높여서 대꾸한다. "왜 그려?"... 그런데 화장실에 들어간 엄니가 소리가 없다. 귀를 기울여도 아무 소리가 없다... 다급한 마음이 생긴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잡고 다시 한 번 크게 소리를 질렀다. "엄마! 엄마!" "........" 헉, 화장실 문을 급하게 두드리자 안에서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여튼 저년 때문에 똥도 지대로 못 싸!" (본문중)

이런 식입니다. 편하게 읽다가도 급박한 대목이 나오면 나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마음 졸이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그리곤 크게 웃게 됩니다. 안도의 웃음인지, 시인의 개그 능력 때문인지 알 수 없습니다. 책장은 아주 잘 넘어갑니다.

평범한 에피소드로 엮인 책 같지만,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땐 왠지 모를 여운이 남습니다. 그냥 '아 재미있는 책이야. 오랜만에 웃었네'가 아니었습니다. 시인의 의도된 복선인지는 모르겠으나 인생사를 느끼게 하는 책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갑작스런 부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인생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도,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시인은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책은 어머니와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지만 소중한 이야기입니다. 사소해서 감히 잊고 살아갈 뻔한 이야기들을 시인은 자연스럽게 상기시켜 줍니다.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 나오는 손자를 먼저 보낸 재동할매의 한마디는 아직도 가슴을 저리게 합니다.

"아가, 재동아....."

시인은 이 책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요?

깊어가는 가을, 당신의 삶을 회고케 하는 책 <꽃 피는 것들은 죄다 년이여>를 추천합니다.
덧붙이는 글 꽃 피는 것들은 죄다 년이여/박경희 지음/서랍의 날씨/2014.8/12,000원

이 글은 개인 블로그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오마이 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대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꽃 피는 것들은 죄다 년이여

박경희 지음,
서랍의날씨, 2014


#꽃 피는 것들은 죄다 년이여 #시인 박경희 #벚꽃 문신 #지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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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보다는 협력, 나보다는 우리의 가치를 추구합니다. 책과 사람을 좋아합니다.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내일의 걱정이 아닌 행복한 지금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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