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과 응봉 그리고 북촌 백악 아래 경복궁, 응봉 아래 창덕궁, 그 사이에 북촌이 자리 잡았다.
김정봉
세운상가 옥상에 올랐다. 경복궁 주산(主山)인 백악(북악)에서 창덕궁의 주산인 응봉(鷹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백악줄기가 마지막으로 용을 써서 응봉에 솟았다. 그 사이로 어머니 가슴에 얼굴 감추듯 슬그머니 파고든 동네가 북촌이다. 누구나 한 번쯤 살고 싶어 하는 길지 중의 길지다. 삼청동, 가회동, 계동, 재동, 안국동, 원서동과 율곡로 건너 경운동, 관훈동, 운니동까지가 북촌이다.
한강은 강남과 강북을, 청계천은 남촌과 북촌을 갈랐다
조선 건국 이래 청계천과 종각을 중심으로 북쪽에 북촌이, 목면산(남산) 아래에 남촌이 있었다. 한강이 강남과 강북을 나누듯 청계천은 남촌과 북촌을 갈랐다. 신분과 재산, 당색에 따라 각각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살았다.
북촌에는 누가 살았을까? 북촌에 팔판동(八判洞)이 있다. 조선시대에 여덟 명의 판서가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만큼 북촌에는 주로 고위관료와 당시 실세가 살았다. 반면 남촌에는 <허생전>의 허생처럼 몰락한 가난한 양반, 하급관리들이 살았다. 이런 현상은 조선 말기에 더욱 심해졌다. 영·정조에서 고종에 이르기까지 약 150년간 북촌의 주인은 집권 실세, 노론이었다.
오죽했으면 남주북병(南酒北餠)이라는 말이 생겨났을까? 남산 밑은 술을 잘 빚고 북촌은 떡을 잘 만들었다 하여 붙여진 말이다. 세상시름을 잊으려 술 잘 먹고 술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남촌과 떡을 자주 해먹은 부자 동네, 북촌의 생활상을 드러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