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푸른집' 외부이효석이 살았던 평양의 '푸른집'을 본떠 봉평에 만들었다.
류효정
강심호의 <대중적 감수성의 탄생>에 따르면 1930년대 서울이었던 경성은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조선인 거주 지역인 북촌과 일본인 거주 지역인 남촌으로 나눠져 있었다. 그리고 각각에 종로와 본정(명동)의 상권이 형성됐다.
이때 경성에는 무려 6개의 백화점이 있었다. 그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일본인이 설립한 미쓰코시 백화점과 조선인이 설립한 화신백화점이다. 미쓰코시 백화점의 경우 360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짐작된다.
당시 조선인들은 이러한 백화점을 통해 근대적 소비문화에 점차 익숙해져 갔다. 조선은 일본의 경제발전을 위한 상품시장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
채만식의 <탁류>에서 계봉이가 젊음을 뽐내며 백화점 직원으로 일했던 것도, 이상의 <날개>에서 주인공이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에서 비상을 꿈꾸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1930년대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조차도 취직할 곳이 없을 정도로 식민지 경제가 악화된 때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많은 조선인들은 근대적 소비는커녕 하루의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갔다. 이런 현실 속에서 근대적 소비는 당대의 부유층에게나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이효석은 전문학교 교수라는 안정적인 직업, 살뜰한 아내와 부유한 처가가 있었기에 어느 정도 수준의 근대적 소비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효석을 포함하여 당시에 근대문명을 소비했던 지식인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당대의 많은 모더니스트 중의 한 명으로 치부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지식인으로서 역사의식이 없음을 질타해야 하는 것일까. 어느 쪽으로 판단을 하든지 이효석의 삶이 1930년대를 살았던 지식인의 한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흥미롭다.
서구문명에 매몰돼 버린 이효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