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의 메신저 대화그동안 메신저를 통해 엄마와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정든 이곳을 떠나야 할때다.
이정혁
스마트폰을 받아 쥐고 아이처럼 즐거워하던 엄마의 모습, 그리고 이제 이웃 아주머니들과 메신저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하던 그 모습들이 아직도 선해. 그때야 비로소 내가 자식 노릇 제대로 했구나, 하고 느꼈으니까.
전 국민의 메신저라는, 노란 바탕에 까만 말풍선 메신저를 통해 우리는 예전답지 않게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 아들들이라는 게 하나같이 무뚝뚝하잖아. 그래도 메신저 상에서는 애교도 부리고, 손주들 노는 사진들도 보내주고, 그러면서 모자간의 정을 확인할 수 있었지. 엄마가 이렇게 스마트폰을 잘 사용할 줄은 몰랐어. 복사하기 기능을 통해 신종 사기 수법에 조심하라고 대화를 보내왔을 때는 눈물이 날 지경이었어. 아직도 내가 엄마 품에 있다는 따뜻한 느낌이랄까?
그런데, 엄마. 한동안은 이런 만남이 힘들 것 같아. 나는 이제 그곳을 떠나려 해. 우리만의 공간, 우리만의 추억을 쌓는 장소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엄마도 궁금할 테지. 쉽게 한 번 설명해 볼게.
지난 추석 때, 아파트 현관 앞 화단에 무성하게 열매 맺은 대추나무를 보면서 했던 말 기억나? "대추를 뭐 하러 사다 써, 여기서 몇 개 따서 쓰지" 그랬더니 엄마가 말했지. "야, 그거 다 주인이 있는겨, 노인네가 자기가 물주고 비료 줬다고 자기 꺼라고 얼마나 눈 무섭게 뜨고 감시하는디…."
공공주택 화단에 열매 맺은 나무를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는 김씨 할머니를 두고 우리는 메신저로 많은 흉을 보았었지. 그런데 만에 하나, 엄마가 이웃 아주머니들한테 흉보는 이야기를 하다가 그 얘기가 김 할머니한테 전해지면, 우리의 메신저는 검열을 받을 수 있어. 우리의 행위는 김 할머니의 명예를 훼손한 일이 되거든. 더구나 자식들 중에 검찰 관계자라도 있다면 그건 백발백중이야.
더구나 김 할머니가 고소 고발을 하지 않아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검찰은 선제적 수사를 시작할 수 있다고 해. 김 할머니는 가만히 있어도 엄마와 나의 대화가 담긴 메신저는 검열 당할 수 있는 거야. 물론, 그런 정의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에 대해 한편으로 고맙게 생각할 수도 있어. 바닥부터 훑어서 불순의 씨앗을 말리겠다는 검찰의 의지는 존경받아 마땅하지. 우리 같은 서민들이야 무슨 피해가 있겠냐만은 그래도 조심은 해야 할 것 같아. 김씨할머니가 근거 없이 우기는 데는 뒤에 무언가 막강한 권력이 숨어 있다고 봐야 해.
비겁한 중생의 사이버 망명기엄마, 그렇다고 이런 결정을 내리기가 쉬웠다는 건 아니야. 노란 메신저에는 그동안 정들었던 400여 명의 소중한 친구들이 남아 있어. 그리고 거기에 적던 나의 스토리들은 더없이 행복했던 기억들이야. 하지만 그렇게 정들었던 그곳을 대변한다는 법률대리인의 글은 나를 더욱 처참하게 만들고,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어(이 글을 쓴 변호사는 지난 10일 직을 사임했어).
"자신의 집에 영장 집행이 와도 거부할 용기가 없는 중생들이면서, 나약한 인터넷 사업자에 돌을 던지는 비겁자들"이라는 글을 SNS에 남겼더라고. 맞아, 나는 영장 집행이 오면 그걸 거부할 용기가 없는 그저 평범한 소시민이야. 무소불위의 검찰 권력에 맞서 싸우지 못하는 비겁자인 셈이지. 그렇기 때문에 300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이용한다는 나약하고 영세한 인터넷 사업자에게 돌을 던질 생각은 없어. (그 돌을 맞는다고 정신 차릴 사람들이 아니니까. 맘 같아서는 방파제에 쓰는 테트라포드(다리 4개 달린 콘크리트 블록)라도 던져주고 싶지만 말야) 그래서 그냥 말없이 돌아서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