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후배 사이는 멀어도 5년 동안 설계실과 기숙사 생활, 건축 여행을 함께 하는 같은 반 학생들은 가깝다.
김소연
"그러고도 너희들이 선배야?..." 선후배를 들먹이는 내 말은 2, 3학년 모두에게 효과가 없어 보였다. 이제 어떡하나? 얼마 전에 있었던 설계실 대청소가 생각났다. 학생들이 밤늦도록 모형작업을 한 다음 날, 나는 아침 8시 수업을 시작하자마자 설계실 청소부터 시켰다. 피곤에 절어 휘적휘적 청소하는 학생들 사이로, 아직 오지 않은 학생의 책상 위에 먹다 남은 간식거리가 말라비틀어진 채 널려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그것을 치우려고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내가 한소리를 했다. 다들 피곤하겠지만 설계실은 같이 사용하는 공간이니 친구가 없어도 치울 건 치우자고. 그랬더니 한 학생이 놀라며 이렇게 대답했다.
"당사자가 없는데 어떻게 남의 책상에 함부로 손을 대요?"나는 버려야 할 물건을 보았고 그들은 그 물건이 놓인 타인의 영역을 보았다. 나는 그걸 치우지 않는 그들을 이기적이라고 여겼고, 그들은 타인의 영역에 손을 대라는 나를 무례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렇게 사소한 일에도 오해가 끼어들 수 있었다.
그제야 나는 2, 3학년의 태도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3학년이 2학년에게 직접 따지지 않고 내게 먼저 말을 한 것은 유치한 고자질이 아니었다. 상대방을 모르기 때문에 두 팀 모두를 알고 있고 문제의 발단을 제공한 나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또 3학년은 가뜩이나 자신들의 고유 영역을 내놓아 불편하던 차에 알지도 못하는 2학년이 묻지도 않고 가져갔으니 괘씸했을 테지. 2학년은 그걸 알기에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했던 것이다.
한국에서라면, 아무리 모르는 사이라도 명색이 선후배인데 그깟 일로...하며 '선후배'를 강조하겠지만 그곳에서는 '모르는 사이'에 방점이 찍힌다. 잘 모르는 사이라면 굳이 선후배를 따질 일도 없고, 신경 쓸 일도 없게 된다. 간혹 선후배가 친하게 지내면 수직적인 선후배가 아닌 수평적인 친구 관계이다.
한국의 대학생은 다르다. 학번이 앞서면 상대방을 잘 알고 모르고를 떠나 나이에 관계없이 무조건 선배 대접을 한다. 학번 차이가 좀 나면, 속으로는 '뭐 저런 선배가 다 있어' 하면서도 내색은 못 한다. 남학생끼리는 더한 경우도 있는데, 때로는 학번이 군대의 계급장 같다.
건축학과의 경우, 선후배 관계는 전공 특성상 제법 끈끈한 편이다. 건축학과 학생들은 설계를 교수한테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선배를 통해서도 배운다. 공모전이나 졸업작품전을 하는 동안 후배는 선배의 작품을 도와가며 수업시간에 다루지 않는 소소한 것들을 배운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솜씨 좋은 후배는 여러 선배들이 탐내는 바람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디자인 감각이 뛰어난 선배에게는 후배들이 도우미를 자청하곤 했다. 실력을 떠나 인간관계가 좋으면 좋은 대로 또 북적이는 팀을 만들 수 있었다. 졸업 설계 하나 마치면 설계비용보다 후배들 밥값과 술값이 더 들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설계를 매개로 맺어진 선후배 관계는 사회에 나가서도 유지되고 때로는 평생 의형제자매가 되기도 한다.
내가 중국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아쉬운 것이 바로 그런 선후배 관계였다. 한국이라면 선배에게 이미 배워서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를 내가 반복해야 할 때, 선배를 통해서 타산지석의 교훈을 못 배운 후배가 그 전철을 되풀이할 때, 학생 공모전에 나가더라도 실력과 솜씨가 다양한 선후배가 아닌 고만고만한 동기끼리 어울려 참가할 때, 한국식 선후배 관계가 아쉬웠다.
한 번은 3학년과 4학년 합동 품평회를 열어 서로 안면도 트고 주거니 받거니 배우며 인간관계를 넓히기를 바랐다. 하지만 학생들은 그럴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않았다. 그런 식의 만남이 부자연스럽다며 불편해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작업을 하는 그들은 왜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냐며 자존심의 문제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들에겐 선후배라는 이름만으로는 '우리'가 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학교 단체 행사에서 보고 헤어지면 그만인 사이였다. 같은 학번이라도 전공 수업을 반별로 듣다보니 반이 다르면 또 거리감이 있었다. 건축학과는 5년제에 설계실 중심의 생활이라서 더 그렇다.
그들은 5년 내내 같은 설계실에서 생활하고 5년 내내 같은 기숙사 방에서 지낸다. 한국의 건축학과도 5년제이지만 매 학기마다 각자 원하는 설계 수업을 신청하기 때문에 설계실과 설계 동료가 계속 바뀌게 된다. 기숙사도 입학부터 졸업까지 줄곧 같은 사람과 방을 쓰지는 않는다. 그러니 중국학생과 한국학생이 대학교에서 맺는 관계의 범위와 깊이는 차이가 난다.
동창보다 동향을 중요하게 여기는 중국인들일설에 의하면 중국인은 동창보다 동향(同鄕)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과거 대도시에서 운영되던 전통적인 '회관'을 봐도 동향 문화가 남다르긴 하다. 외지에 지역별로 '회관'을 설치하여 그곳에 온 고향 사람들을 보호하고 지원할 정도로 동향의식이 강하다. 가끔 학교에서 들려오는 청탁 이야기를 들어 봐도 '같은 고향 사람이니' 잘 봐 달라는 식이었다.
하긴 중국이라는 그 넓은 땅에서 그 많은 전쟁과 환란, 배신을 겪다보면, 그나마 믿을 만한 사람은 핏줄이고, 그 다음이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한두 다리 건너면 알 만한 고향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교통이 발달하고 지역간 이동이 자유로우며 교육의 기회가 확대된 교육환경에서 동창의 의미는 그 옛날 사부를 모시고 동문수학하던 시대와는 차이가 있다. 일정한 기간에 같은 학교를 다닌 사람, 그 정도의 의미에 불과하다. 중국의 많은 지도자가 칭화대와 베이징 대학 출신이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들의 출신대학보다 어느 지역 출신이고 누구의 자식이라는 말을 먼저 한다. 그들에게 고향은 개인의 학교 성적으로 결정되는 동창과는 질적으로 다른 정서이다.
동창회를 봐도 그렇다. 내가 가르친 학생들은 졸업 후에 동창회를 따로 하지 않는다. 가끔 만나는 동창이 있다면 선후배가 빠진 동기 모임 정도이다. 졸업 10주년, 20주년, 30주년이 되어 동창회가 열려도 대학 단위가 아니라 전공학과, 정원이 많으면 학과내 분반 단위이다. 한국처럼 ○○대학교 총동문회 같은 건 없냐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왜 만나?"였다. 대학생활을 함께 하고 공통된 추억거리가 있어야 한단다. 사업상 필요한 인맥을 만들기 위하여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두루두루 만나는 동창회는 아닌 모양이다.
달리 말하면 한국에서 승진과 출세의 동아줄인 학연이 중국에서는 그만한 위력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같은 피를 나눈 혈연과 같은 땅에서 같은 음식을 먹는 원초적이고 전통적인 지연이 그 역할에 가깝다. 따지고 보면 중국의 관시(关系, 인맥, 연줄) 문화도 아는 사람을 통해 모르는 사람이 연결되는 방식이고, 연결 지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동향이 나오기 마련이다.
어쩌면 중국의 최고 명문대학이라면 사정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칭다오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랬다. 한국인에게 동창이 '우리가 남이가'의 존재라면 중국인에겐 고향 사람이 그렇다. 칭다오에 사업하러 오는 한국인은 동창부터 찾지만, 외지의 중국인이라면 동향인부터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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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이 좋다. 길이 없지만, 내가 걸어가면 길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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