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문 현판1915년 전차궤도의 복선화로 헐려버린 <돈의문>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것은 이 현판뿐이다.
유영호
이렇게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진 돈의문은 참 기구한 운명을 갖고 태어난 문이었다. 한양도성의 사대문 가운데 계속 자리를 찾지 못하고 한양 성곽의 서쪽을 이리 저리 헤매다 이곳에 자리를 잡을 만 하니 일제에 의해 헐려진 문이다.
돈의문은 처음 태조 5년(1396) 도성을 완성할 때 다른 대문들과 함께 건설됐으며, 그 위치는 지금의 독립문 근처 사직동 고개쯤으로 추정된다. 그러던 중 태종 13년(1413) 풍수학자 최양선의 건의로 없어지고 그보다 더 남쪽에 새로 지어져 이름도 서전문(西箭門)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10년도 못 돼 다시 폐쇄되고 세종 4년(1422) 정동사거리에 '돈의문'이란 이름으로 자리하게 된다. 명칭이 뜻하는 바는 '의의(意義)를 북돋는 문'이다.
이렇게 자꾸 자리를 이동하며 새로 지어졌기에 조선 백성들은 '새문' 또는 '신문(新門)'이라고 불렀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속칭 남대문, 동대문으로 불린 것과는 크게 다르다. 그래서 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을 우리는 '새문안로'(서대문로타리~광화문로타리)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돈의문을 서대문이라 명명하는 것은 과연 일제의 잔재인지 조금 더 알아보기로 하자.
우리는 사대문의 각 고유 명칭보다는 방향을 나타내는 남대문, 동대문, 서대문 등에 익숙하다. 그런데 이것이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명칭이라며 기피하기도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일제 때에만 쓰였던 명칭은 아니다. 광해군 6년(1614) 저술 된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의하면 숭례문, 흥인지문을 속칭 남대문, 동대문이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을끄는 것은 돈의문을 서대문이라 부르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경성(京城) 팔문은 정남은 숭례라 하며 속칭으로 남대문이라 부르고, 정북은 숙청이라 부르고, 정동은 흥인이라 하며 속칭으로 동대문이라 부르고, 정서는 돈의라 하며 속칭으로 신문(新門)이라 부르고, 동북은 혜화라 하며 속칭은 동소문이라 부르고, 서북은 창의라 하고, 동남은 광희라 하며 속칭으로 남소문이라 하고, 서남은 소덕이라 하며 속칭으로 서소문이라 부르고 또 수구문이 있어 이 양문으로 장사지낼 사람이 나간다."(<지봉유설> 중에서) 뿐만 아니라 이러한 관념은 근대에 이르러서도 지켜지곤 했다. <독립신문>의 기사를 훑어보더라도 '새문밖'이니 '새문안' 등의 표현은 나오지만 '서대문'이라고 지칭한 구절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또한 <대한매일신보>의 경우에도 '서대문 정거장'을 일컬어 '새문밖정거장'이라고 적어놓은 사례는 아주 흔하게 발견된다. 물론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보면 초기에 두 번 등장한다. 하지만 그 뒤 '서대문'은 우리의 기록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당시 서울에 거주하던 일본인들 사이에 통용되던 이름이 바로 '서대문'이었다. 일제시대편찬 된 자료를 보자.
"돈의문을 조선인은 신문, 내지인은 서대문이라 부른다."(<조선만록>, 마츠다코, 조선총독부, 1928)"신문(新門) 즉 내지인(內地人)이 서대문이라 부르는 것은 이전에…."(<향토자료 경성오백년>, 경성부공립보통학교교원회, 1926)이러한 자료에 근거해 볼 때 당시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일본이 돈의문을 서대문이라 칭하며 새로운 시설이나 지배기관이 들어서거나 행정구역이 개편되는 족족 그들의 편의대로 '서대문'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면서 이런 용법이 더욱 확산됐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대문구, 서대문역, 서대문경찰서, 서대문형무소 등 아직도 '서대문'이라는 표현을 쓴다. 심지어 경인선의 출발지였던 정거장(현 통일로 의주로공원 일대)까지 모두가 다 서대문으로 표기되고 또 그렇게 불리우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일제의 잔재가 지금까지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또 있다. 서울 중구(中區)는 조선시대 청계천 이남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남촌(南村)이라 부르던 곳으로 일제시대 들어와 일본인들이 대거 거주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된 곳이다. 조선총독부, 조선헌병대, 조선신사, 경성신사 등 일본 시설이 주로 있었으며 충무로, 명동 일대가 일본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형성됐다. 영화 <장군의 아들>(1990)에서 청계천 이북 종로를 장악하고 있던 김두한이 청계천 이남 충무로에서 세를 자랑하던 하야시와 결투를 벌이는 장면을 떠올리면 쉽게 상상이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943년 일제는 행정 효율화를 위해 구제(區制)를 실시하며 일본인들이 많이 사는 남촌이 조선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의미로 중구(中區)라고 명명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중구의 핵심이었던 혼마치(本町, 본정)은 충무로로 바뀌었는데 구(區)의 명칭은 여전히 중구(中區)다. 지금이라도 '남대문구'나 '남산구' 정도로 바뀐다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인간의 본성, 인의예지신으로 형상된 한양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