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 해제 |
제목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국에서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이다. 나는 그 길에서 고향 출신의 한 순결한 파르티잔을 만났고, 그분이 위만군의 총탄에 불꽃처럼 산화한 북만주 깊은 산골짜기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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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추리꽃으로, 꽃말은 '지성', '기다리는 마음', '망각' 등이다. ⓒ 박도
▲ 원추리꽃으로, 꽃말은 '지성', '기다리는 마음', '망각' 등이다.
ⓒ 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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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허형식 군장은 왕조경과 진운상이 저녁밥을 짓는 것을 바라보다가 그도 개울물에 손을 닦고 밥 짓는 일을 거들었다. 어린 시절 그는 자기 집 계집종 춘옥이의 밥 짓는 일을 거드는 일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고, 그러다가 아버지에게 들켜 얼마나 혼이 났던가.
"군장님은 가만히 계시라요."
"나도 밥 짓는 것이 즐겁소."
허형식은 그때를 생각하며 싱긋 웃었다. 빨치산들은 상하 구분이 없이 식량은 각자 챙겼다. 그들은 늘 양쪽 어깨에다가 식량 주머니와 탄알 주머니를 X자로 둘러매고 다녔다. 빨치산 생활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몰랐기 때문이다. 허형식도 자기 식량 주머니에서 알곡 한 줌을 꺼내 밥 짓는 데 이미 보탰다.
세 사람은 계곡 옆에서 돌멩이를 괴어놓고 항고(반합)에 밥을 지었다. 왕조경은 황송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하늘같이 우러러보던 허 군장과 함께 밥을 짓다니... 그는 배낭에서 장서린이 허 군장에게 특별히 선물로 준 멧돼지고기를 꺼냈다. 그는 모닥불에 아주 익숙한 솜씨로 멧돼지 고기를 구웠다.
"우리 부대장님이 허 군장님에게 특별히 드린 겁니다."
"고맙소."
허 군장은 왕조경이 잘 구운 멧돼지고기를 주머니 칼을 꺼내 삼등분하여 진운상과 왕조경에게도 똑같이 나눠줬다.
"아닙니다. 군장님이 다 드시라요."
"다 드십시오."
진운상과 왕조경은 말했다.
"먹는 데는 상하가 없소. 혼자 다 먹다가는 배탈도 나고..."
세 사람은 밥 지은 불에 둘러앉아 멧돼지구이와 함께 저녁밥을 맛있게 들었다.
"장 부대장 동지 덕분에 오늘 저녁은 오랜만에 푸짐한 만찬이었소. 돌아가서 장 동지에게 나의 고마운 마음을 전해 주시오."
"그러겠습니다. 군장님!"
왕조경이 고개 숙여 예를 드리며 말했다.
"뱃속이 놀라겠소. 늘 생식을 하거나 푸성귀만 먹다가 멧돼지고기가 들어오니까."
"그럴 때도 있어야지요. 저희 부대는 산중 숯막으로 깊은 골짜기이기에 이따금 멧돼지가 덫에 걸리지요. 그걸 잡아 참나무 연기로 훈제하여 갈무리한 뒤 대원들의 생일이나 귀한 손님이 올 때는 조금씩 꺼내 먹습니다."
왕조경이 대꾸했다.
"아무튼 내 평생 가장 맛있는 멧돼지구이였소."
"저도 그렇습니다."
잠자코 먹기만 하던 진운상이 말했다.
세 사람은 청봉령 산기슭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개울에서 설거지를 깨끗이 한 뒤 그 자리에서 옷을 벗고 몸을 닦았다. 밤 개울물이 몹시 찼다. 그날은 음력 6월 21일로 그때까지 달은 뜨지 않았다.
하룻밤을 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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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의 주인공인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허형식 제3군장 ⓒ 박도
▲ 소설의 주인공인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허형식 제3군장
ⓒ 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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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이 옷을 입으며 말했다.
"오늘 밤은 우리 세 사람 떨어져서 자지 말고 나란히 잡시다."
"군장님이 불편하실 텐데..."
"무슨, 그렇게 해요. 와, 이런 말도 있잖소.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왕 동지와는 초면인데, 밥까지 같이 먹고... 하룻밤 잠까지 자는 건 대단한 인연이오."
두 사람은 허 군장의 제의에 그대로 따랐다. 왕조경은 다시 감동했다. 역시 허형식 군장은 뭔가 다르다고 느꼈다.
그가 풍문으로 들은바, 허형식 군장은 동북 제일의 빨치산으로, 그의 용맹성과 전투력은 북만에서 제일이라고 전해 들었다. 그런 허 군장을 그날 곁에서 뵈니까, 6척 큰 키에 눈썹이 짙으며 이목구비가 뚜렷한 매우 잘 생긴 인물, 그리고 부하를 대하는 인품과 그 태도에 왕조경은 그만 홀딱 반했다. 조금 전 멱 감을 때 훔쳐보니까 거시기도 일품이었다. 역시 소문대로 허 군장은 풍채도 좋고, 그 인품이 훌륭하다는 것을 느꼈다.
허 군장은 <손자병법>이나 <육도삼략> 등 중국의 전통 병법에도 매우 능한 무장으로, 나관중의 <삼국지>는 통달하고 있었다. 또 그는 의술에도 뛰어나 처방전도 잘 썼다. 당신 아버지 시산(是山) 허필(許苾)은 한학자요 의원이었으며, 그가 존경하며 따랐던 큰집 사촌 형 일창(一蒼) 허발(許坺) 역시 한학자요 의원이었다.
시산과 일창은 만주로 가기 전 구미에서도, 만주에서도 한의원으로 독립지사들의 군자금과 뒷바라지를 하였으며, 해방 후 일창은 만주에서 돌아와 서울 북창동에서 일창약국을 경영한 명의였다. 이렇듯 허형식은 의원 집안 태생이었기에 어깨너머 배운 의술로 항일 유격전 중에도 많은 부하들을 살려냈다고, 후일 그의 평생 항일 동지 김책은 회고했다.
허 군장은 조선인이었지만 한어(중국어)도 매우 능숙했다. 왕조경은 그런 허 군장을 곁에서 지켜보며 속으로 뇌까렸다.
'당신은 조선인이지만, 우리 항일연군 군장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흠모합니다.'
세 사람은 이미 평평하게 다져 놓은 숙영지에 홑이불을 깔고 덮으며 나란히 누웠다. 허형식이 가운데 눕고, 그 좌우에 진운상과 왕조경이 누웠다. 그때까지도 하현달은 뜨지 않았다. 하지만 여름밤 북만 하늘의 별은 잘 익은 석류처럼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별이 참 아름답군!"
허형식은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감탄하여 말했다. 그는 어린 시절 여름이면 구미 임은동 고향 집 마당 평상에서 하늘의 별을 헤아리다가 잠들곤 했다. 그럴 때면 은하수가 금오산 현월봉 위로 흘렀다. 허형식은 문득 어린 시절을 되새김질했다.
허형식은 그날 따라 춘옥이가 거듭 생각이 났다. 자기보다 한 살 위인 그는 '도련님'이라 부르며 엄청 따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루어질 수 없는 풋사랑'으로 여겨지면서도 끝내 자기가 그를 구하지 못한 게 당신 잘못 같기도, 그것은 어른들이 말하는 운명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춘옥이가 허형식을 항일의 길로 인도한 요인이기도 했다.
허 군장의 고향
"정말 은하수의 별들이 금방 쏟아질 것만 같구먼요."
왕조경도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에 허형식은 현실로 돌아왔다.
"내 고향보다 이곳 북만은 북극이 가까운 탓인지 북극성도, 북두칠성도 더 밝은 것 같소."
"아, 네."
그 말을 받아 왕조경은 허 군장에 대한 궁금한 점을 물었다.
"군장님, 고향은 어디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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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 금오산 들머리의 채미정으로, 고려말 충신 야은 길재 선생의 충절과 학문을 기리는 정자다. ⓒ 박도
▲ 구미 금오산 들머리의 채미정으로, 고려말 충신 야은 길재 선생의 충절과 학문을 기리는 정자다.
ⓒ 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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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은 한참 뜸을 들인 뒤, 대답했다. 그는 그때까지 춘옥이의 잔상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내 고향? 여기서 상당히 머오... 조선 남쪽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임은동 264번지가 내 고향 집이오."
"아주 고향 집 주소를 정확하게 외우십니다."
"조국 해방이 늦어 행여 고향산천이 변해 고향 집을 못 찾을까 주소를 여러 번 되뇌니까 아주 머릿속 깊이 새겨졌소."
"그 구미란 곳이 한성과는 멉니까?"
왕조경은 허형식을 말을 되받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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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 금오산 ⓒ 박도
▲ 구미 금오산
ⓒ 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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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한성에서 한 6백 리쯤 떨어진 남쪽이오. 그곳에 금오산이라는 높은 산이 있고, 그 앞에 넓은 평야가 펼쳐지고, 그 가운데로 낙동강이라는 큰 강이 흐르고 있소."
"아주 살기 좋은 고장인 것 같습니다."
"그럼, 내 고향마을은 산남수북(山南水北)으로 명당 마을이지요. 거기다가 예로부터 금오산 정기를 받고 큰 인물이 난다고, 내 고장 일대는 여러 곳 사람들이 몰려들었소. 김해에 사시던 내 고조할아버지도 돛단배를 타고 그곳을 지나다가 그 일대 산수경치에 반해 정착했을 정도로."
"아, 네에."
왕조경은 감탄을 연발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이 '들꽃'은 주 2회 연재로 매주 월, 목요일에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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