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흔드는 북한 고위대표단4일 인천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열린 2014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에서 황병서 북한군 총정치국장, 최룡해 노동당 비서, 김양건 당 통일전선부장 겸 대남담당 비서 등이 북한 선수단이 입장하자 일어나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북한 실세 3인방의 방남은 그 파격성만큼 파장도 컸다. 며칠 간 언론의 주요 이슈로 다뤄졌다. 비교적 긍정적인 보도였다. 국제 사회에서도 관심사가 되었다. 최근 몇 년 간 북한발 이슈는 부정적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번 3인방의 방문으로, 모처럼 북한 뉴스가 안방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청와대는 북한 이슈가 이렇게 파괴력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황병서 미스터리'
하지만 황병서 총정치국장이 북한 최고실세들의 방남에 단장 자격으로 동행한 것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황병서 총정치국장은 김정은 제1위원장에 이은 북한의 사실상 2인자다. 유일체제에서 2인자는 의미가 없다는 의견도 있지만 북한의 사실상 2인자가 또 다른 고위급을 대동하고 방남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 처음이다.
이들이 단지 아시안게임 북측 선수단 격려 차원에서 방남한 것이라면 총정치국장이 굳이 오지 않아도 된다. 최룡해 국가체육지도위원장과 김양건 대남당당 비서로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국가체육지도위원회는 처형 당한 장성택이 위원장이었고 이를 최룡해가 물려받았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최대 관심사 가운데 하나가 '체육강성대국 건설'이므로 국가체육지도위원회에는 북한의 거물급 인사들이 대거 몰려 있다.
황병서를 포함한 3인의 방문은 김정은 체제의 새로운 대남전략의 출발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북한의 3인방은 당국자 접촉 과정에서 수차례에 걸쳐서 "지금 남북관계가 워낙 막혀 있기 때문에 이것을 풀기 위해서는 좀 더 파격적인 어떤 그런 사건이 있어야 되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파격적으로 한 번 문제를 접근해 보자"고 말했다고 한다. 또 박근혜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언급한 '작은 통로'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오솔길을 냈으니 큰 통로를 열자'고 말하기도 했다.
이들이 파격적으로 문제에 접근해 보자는 것은 남북 관계의 여러 가지 현안들을 현안별로 하나씩 풀어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총정치국장이 아시안게임 선수단 격려 명목으로 방남한 사건을 통해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포석을 놓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7년 동안 북한이 통상적으로 사용한 대남정책 수단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말폭탄'을 비롯한 강력한 위협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지나칠 정도의 저자세였다.
이는 당장의 성과에 집착하는 근시안적인 발상이었다. 효과도 없었다. 강력한 위협은 남북관계를 악화 시키고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확산 시켰다. 저자세 외교는 한국의 보수정부로 하여금 '북한을 더욱 몰아붙이면 붕괴까지 가능하다'는 판단을 가능하게 했다. 역효과만 본 것이다.
그간 김정은 시대의 정책은 김정일 시대의 관성과 패턴에서 벗어나려는 조짐을 조금씩 보여 왔다. 김정은 시대는 김정일 시대에 비해서 대외적으로 투명성을 높이려는 과감한 조치를 부분적으로 취하기 시작했다.
2012년 4월에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면서 서방 언론에 공개한 것이나 실패한 사실을 즉각적으로 인정한 것이 그 출발이었다. 이후 억류 미국인들에 대한 서방 언론의 취재를 허용하거나, 김정은 위원장과 부인 리설주가 동행하는 모습을 공개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버럭 화를 내던 과거와 달리 인권보고서를 만들어서 대외에 공개하기도 했다. 김정은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공개한 것도 이례적이다. 수령이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유일체제인 북한에서는 최고 지도자의 건강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보안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굳이 감추지 않는 것도 북한 국가수립 이후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다.
이번 황병서 총정치국장의 방남은 이 같은 김정은 체제의 변화가 대남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서다. 일반적으로 북한은 노동당 통일전선부를 중심으로 한 '대남 유화파'와 군부를 중심으로 한 '대남 강경파'로 구분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총정치국장이 김양건 대남담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과 함께 방남했다. 북한 군부와 통일전선부가 대남정책에서 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결국 황병서 총정치국장의 방남이 담고 있는 미스터리에 대한 풀이는 '파격적인 조치', '오솔길이 아닌 대통로'라는 두 가지 발언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황병서 총정치국장의 방남으로 남북관계 개선의 '대통로'를 열기 위해 과거의 패턴이나 관성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조치'를 하겠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이것은 김정은 시대의 변화된 새로운 대남협상 행태로 보인다.
김정은 체제가 대통로를 열기 위한 조치를 어떻게 취할 것인지에 대해서 분석하고 예측하지 않는다면 북한의 전략 변화에 매번 헛다리를 짚을 가능성이 크다. 김정은 체제가 출범한 지 2년이 지났지만 ▲ 3대 세습 ▲ 장성택 숙청 ▲ 잦은 말폭탄 위협 ▲ 김정은 위원장의 어린 나이 때문에 김정은 체제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늘어났다. 덩달아서 김정은 체제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와 분석은 과거에 비해서 훨씬 소홀해졌다.
꽉 막힌 한반도 정세에 낸 '숨구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