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동쪽 해안의 깎아지른 듯한 벼랑.
이승숙
강화도를 중요시하면서 요새화 시킨 것은 고려시대부터 시작된다. 강력한 지도자의 등장으로 중국 대륙을 통일한 몽골은 주변 지역을 위협했다. 고려 역시 몽골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몽골의 사신 '저고여'가 본국으로 돌아가던 중 압록강 인근에서 피살되자 몽골은 이것을 기회로 고려를 침공했다. 고려는 대항하였으나 수도 개경이 포위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화의를 성립하게 된다.
몽골군을 막기 위해 쌓은 강화 외성몽골이 철군하자 고려 조정은 장기 항전을 위해 강화도로 천도하고, 새로운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내성, 외성, 중성을 쌓았다. <고려사>에는 고종 24년(1237)에 외성을 쌓고 37년(1250)에 중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고려사절요>에는 고종 22년(1235) 12월에 당시 최고 실권자였던 최우가 주와 현에서 공역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징발해서 강화 연안의 제방을 더 높게 쌓은 것으로 되어 있다.
몽골은 여러 차례에 걸쳐 고려에 쳐들어온다. 그러나 강화도에 있던 고려의 중심 세력들을 굴복 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고려와 몽골은 화의를 맺는다. 몽골은 강화도가 눈엣가시처럼 생각이 되었는지 화의의 조건으로 강화 천도 시절의 궁궐과 성들을 다 부수기를 요구했다.
고려는 몽골의 요구대로 강화도의 궁궐과 성들을 허물었다. 몽골의 사절들은 빨리 부수기를 독촉했다. 성을 허물어뜨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고 병사들의 한탄과 고통스런 울음 또한 그에 버금갈 만큼 컸다.
사적 제 452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는 외성은 강화의 동쪽 해안을 따라 쌓은 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길이가 약 3만7076척(약 12킬로미터)에 달하며 흙으로 쌓은 성이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몽골의 요구에 의해 성을 파괴한 후로 흔적만 남아있던 것을 조선시대에 와서 강화도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다시 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