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간 '피스 카페'에 걸려 있는 그림. 슬픔으로 가득한 눈망울로 밥을 먹고 있는 티베트 소녀.
송성영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난민들과 함께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에 망명정부를 세운 1959년, 인도 정부는 난민촌을 세우고 티베트인 난민 3만 명을 받아 주었다. 그러나 두터운 양털 옷을 입고 인도에 도착한 난민들은 열대의 더위와 장맛비에 시달렸다. 변변치 못한 먹을거리로 굶주림에 시달리던 난민들에게 열대 지방의 치명적인 병균들이 급습했다. 그 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굶어서 죽어 나가는 티베트인들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날 저녁, 우리 일행들은 맥간에서의 마지막 날을 기념하자며 치킨과 맥주 한두 병씩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는 이미 서양인 6~7명이 모여 떠들썩하게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아래층에서 머물던 우리 일행들에게 조용히 하라며 까다롭게 굴었던 나이 많은 독일인 여자도 보였다.
우리 숙소 앞에서 술판을 벌이는 것이 미안했는지 서양인들이 자리를 함께 하자고 했다. 하지만 모두가 한 자리에 앉을 수 없어 우리는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그날 저녁 대구에서 왔다는 대학생이 합류했기에 우리 일행은 모두 7명으로 늘어났다.
맥간에서 보냈던 나흘간을 기분 좋게 풀어놓고 한창 술판을 벌이고 있는데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서양인이 술잔을 들고 다가 왔다. 자신은 캐나다 사람이라고 소개하더니 우아하고 가냘픈 몸짓으로 내게 대뜸 수염이 너무 멋지다며 거듭해서 관심을 보였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독일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그 캐나다 사내는 술에 취해 횡설수설했지만 기분 나쁜 사내는 아니었다. 그가 다시 서양인들이 모여 있는 제자리로 떠나자 한국 친구들이 내게 한 마디씩 농담을 건넸다.
"저 사람 게이 같은데요." "선생님 좋아하나 봐요.""독일 할머니도 선생님하고 얘기할 때는 뭐라 그러지 않더니, 독일 할머니처럼 저 사람도 선생님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게이라고 해서 나쁘게 보면 안 되지, 게이일지도 모르지만 저 친구 사람 좋아 보이잖어. 근디 왜 하필이면 나이 많은 할머니나 남자가 나를 좋아하지? 여기 이쁘고 멋진 청춘들이 수두룩헌디잉. 그려, 그래도 좋아한다니 좋구먼."우리는 화제를 바꿔 서양 남자들이 왜 동양 여자들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다가 동남아인가 유럽 쪽인가를 통해 인도로 들어왔다는 대구 청년이 그 작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미국 사람들과는 달리 유럽 애들은 질이 안 좋아요.""같은 서양인이라 해도 미국 사람들보다 유럽 사람들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내가 군대 생활을 할 때 미군 애들과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그 놈들은 한국 여자를 성 노리개쯤으로 여겼어."맥주 두 병에 술기운이 오르던 나는 군 생활을 하면서 미군 헌병들과 근무했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미군 얘기가 입 밖으로 튀어 나오자 나는 점점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군 애들은 우리를 속국으로 여기고 있다니께. 그런 놈들이 뭐가 좋다고. 전쟁과 학살이 일어나는 지역을 보라고 대부분 미군 놈들이 개입되어 있다구. 석유 뽑아 먹으려고 이라크를 침공할 때 어땠는 줄 알어? 이라크의 어린애들이 폭격으로 처참하게 죽어나가고 있을 때 팔십 프로에 가까운 미국 놈들이 전쟁을 찬성했다고, 용서할 수 없는 놈들이지."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사실 대구 청년은 자신이 만난 미국사람들을 얘기한 것이었는데 나는 미국인 모두를 '미군'으로 싸잡아 얘기하고 있었다. 열흘 가까이 함께 했던 동료들조차 멀뚱멀뚱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점점 무거워져 가는 분위기를 파악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나이 값도 못하고 공연히 동료들에서 공격적으로 말해서 미안했다. 이래서 나는 제 감정 조절조차 못하는 얼치기 진보주의자였던 것이다.
"아이구, 맥주 두 캔에 술이 취했내벼, 미안혀 공연히 큰 소리쳐서, 나 먼저 들어가 잘게, 재밌게들 놀어."내 방으로 돌아오면서도 여전히 용서할 수 없는 인간들에 대해 화 기운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그 화 기운을 가라앉히기 위해 달라이 라마의 용서를 떠올렸다.
"용서는 값싼 것이 아니다. 화해도 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용서할 때 우리는 누군가에게 문을 열 수 있다. 그 문을 열기 위해서는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 가장 큰 수행은 용서다."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용서란 진정으로 제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중국이나 미국 등의 강대국들, 그리고 일말의 양심도 없이 거짓과 권력을 무소불위로 휘둘려 대는 한국의 정치가들과 법조인, 자본가들, 제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적반하장으로 오히려 큰 소리치고 있는 저 인간 말종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나는 내 안에 큰 스승으로 자리 잡고 있는 달라이 라마의 법문조차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었다. 가장 큰 수행은 용서라고 하지만 내게 용서라는 단어는 여전히 아주 먼 곳에 있었다. 그렇게 나는 자비심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달라이 라마의 기운이 서려 있는 맥간의 마지막 밤 내내 화 기운과 마주하고 있었다.
"아,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마음자리를 어떻게 다스려야 한단 말인가. 티베트 사원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왔던 어제의 눈물은 평화를 갈망했던 자비심이 아니라 단지 분노였단 말인가. 자비심 없는 분노는 너와 나 모두를 파멸로 이르게 하질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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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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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두 병에 까먹은 내 나잇값... 용서 쉽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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