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 판 돈은 손자 용돈으로 줘라"

11살 된 대추나무들과 아버지에 대한 단상

등록 2014.10.03 16:47수정 2014.10.0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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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첫째날 우리 집안의 선산이 있는 예고개로 갔다. 이곳은 안동과 영주와 봉화로 가는 세갈래의 갈림길에 위치한 곳이다.


구미에서 출발해 안동 IC에서 내려 우리의 종가댁이 있는 서후면 '의성김씨학봉종택'을 거쳐 예고개를 향했다.

어릴적엔 성묘나 시사를 지낼 때마다 영주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걸려 온 곳이 종가댁이 있는 서후면이었는데, 이제는 도로망이 너무나 잘 나 있어 가까운 곳이다.

30년 세월동안 봐온 예고개로 가는 길의 주변 풍경은 어릴적과는 다르게 나와 같이 나이가 들어가고 있음을 느끼는 요즘이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 자연속의 산과 숲도 천이라는 과정을 거쳐 역동적인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보인다는 것이 이젠 눈에 보이기 시작한 나이가 된 것 같다.

예고개에 간 이유는 따뜻한 가을 햇살을 받으며 야무지게 무르익어 가는 대추를 수확하기 위해서였다.


2012년도 10월에 대추나무를 털던 아버지의 사진 올해는 아버지께서 다리를 삔 관계로 나 혼자 대추나무를 털었다.
2012년도 10월에 대추나무를 털던 아버지의 사진올해는 아버지께서 다리를 삔 관계로 나 혼자 대추나무를 털었다.김도형

이곳의 대추나무는 10년 전에 아들 경록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께서 심어 놓은 것이라서 아들과 나이가 얼추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대추나무를 처음 심었을 때는 아버지께서 역사 선생님으로 오랜 세월 일하신 영주고등학교를 정년퇴임한 해였다.

교직에서 퇴임하신 후로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선산의 일부를 개간하여 다양한 종류의 농작물을 재배하셨다. 그리고 이곳을 하나 둘 씩 가꿔서 자그마한 간이 주택도 만들고, 친구분들과 이따금씩 모임을 갖고 여흥을 즐기는 장소로 활용하시곤 한다.


10년 동안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부지런히 일하셔서 이제는 농사꾼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으실 정도로 다양한 농작물을 풍성하게 수확을 거두시고, 서울과 구미에 있는 우리 형제들에게 수확한 것들을 푸짐하게 보내주신다.

대추나무는 아버지께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나무다. 아들 경록이의 탄생과 함께 아버지의 은퇴를 기억하게 하는 나무이기도 하고, 대추 수확하실 때면 무뚝뚝한 아버지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기도 한다.

게다가 3년 전부터 일손이 필요할 정도로 대추가 많이 열리기 시작해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도움을 요청하면 만사 제쳐 두고 도와드리러 올라오게 된다.

아버지께서 10년 전에 심은 대추나무들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 경록이가 태어나던 해 아버지께서 손주를 위해 심어놓으셨다.
아버지께서 10년 전에 심은 대추나무들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 경록이가 태어나던 해 아버지께서 손주를 위해 심어놓으셨다.김도형

2012년도에는 대추나무가 풍작이었고 지난해에는 흉작이었다. 흉작 다음해에는 종족 번식을 위해 많이 열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올해 또한 2012년도처럼 풍작이었다.

원래는 이날 오기 일주일 전에 어머니께서 대추를 따러 올라오라고 하셨지만 비가 많이 내려 취소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날씨는 좋았고 일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이었는데, 문제가 있었다.

지난 일요일에 축구를 하다가 발목을 삐어버린 관계로 침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발목이 퉁퉁 부어 올라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는 이날 대추 따는 것을 도와드리겠다고 말했고 다쳤다는 얘기는 차마 못 드렸다.

아빠의 삔 다리를 정성껏 치료해주는 아들과 딸 발목에 삘 때 우두둑 소리가 나 불구가 되는 줄 알았지만, 다행히 회복력이 강한 신체 덕분으로 이젠 걸어 다닐 만 하다.
아빠의 삔 다리를 정성껏 치료해주는 아들과 딸발목에 삘 때 우두둑 소리가 나 불구가 되는 줄 알았지만, 다행히 회복력이 강한 신체 덕분으로 이젠 걸어 다닐 만 하다.김도형

아버지께서 내가 다리를 저는 모습을 보게 되면 분명히 야단치실 거란 생각을 감수하며 예고개 선산에 있는 밭으로 올라갔다. 대추밭에서 대추를 수확하시느라 정신없이 바쁘실 거라고 생각하며 올라갔는데 아버지, 어머니는 다른 일을 하고 계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앉아서 어머니께서 수확해오신 깨들을 정리하고 있었고, 아버지의 모습은 그다지 유쾌해 보이시진 않으셨다. 물론 늘 무뚝뚝하신 면은 있으셨지만 평소와는 달라 보이셨다.

이상하게도 보통은 아버지가 깨를 수확해 날라야 하는데 어머니께서 나르시고 아버진 앉아서 다듬고만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일하시는 모습 아버지께선 앉아서 일하시고 어머니께선 활발히 움직였다. 뭔가 뒤바뀐 상황임을 처음엔 눈치 채지 못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일하시는 모습아버지께선 앉아서 일하시고 어머니께선 활발히 움직였다. 뭔가 뒤바뀐 상황임을 처음엔 눈치 채지 못했다. 김도형

눈치를 본 뒤 혼자서 대추를 따러 밭으로 갔다. 딴다기보다는 턴다는 말이 맞겠다. 대추는 일일이 손으로 따면 그 수확량이 얼마되지 않는다. 하지만 털게 되면 순식간에 한 자루가 되는 양이 쏟아진다.

다소 다리를 절어 불편했지만 대추나무 밑에 대추를 모우기 위한 촘촘한 그물을 깐 뒤 대추나무의 줄기를 잡고 사정없이 흔들었다. 후두둑 머리 위로 떨어지는 대추가 마치 소나기 오는 듯했고, 머리를 툭툭치며 떨어지는 대추들이 온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체육복 바지를 입고 간 관계로 산모기와 벌레들이 바지를 뚫고 침을 쏘아대는지 연신 따끔했다. 그렇지만 대추나무를 터는 순간 만큼은 풍성한 수확의 느낌이 들어 재미있고 신이 났다.

다리를 절둑거리며 모은 대추들 수확의 풍성한 기쁨을 한없이 맛볼 수 있는 것이 대추나무다.
다리를 절둑거리며 모은 대추들수확의 풍성한 기쁨을 한없이 맛볼 수 있는 것이 대추나무다.김도형

일하고 있다보니 어머니께서 다가와 어저께 있었던 얘기를 하며 속상해 하셨다. 믿고 지내던 지인에게 그다지 큰 액수는 아니지만 보증을 서줬는데 지인이 돈을 갚지 않고 어디론가 가버린 바람에 곤란한 상황이 되었고, 그 사실을 아버지께서 아시곤 호통을 치셨다고 한다.

쾌활한 어머니께서 조용히 얘기하시며 많이 속상해 하신 걸 보니 마음이 안스러웠다.

게다가 아버지께서도 얼마전에 테니스를 치시다가 발을 삐셨다는 얘기를 하셨다. 그제서야 아버지께서 왜그리 저기압이었고 앉아서 일하시는지 이해가 갔다. 희한한 일이었다. 아버지께서 발을 삔 뒤 나도 발을 삔 것이라서 혹시나 아들 경록이도 다치지 않을까 짐짓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제서야 어머니께 아버지처럼 나도 발목을 삐었노라고 말씀드리며 신기한 일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어머니는 다쳤는데 왜 올라왔냐며 걱정하며 말하셨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똑같이 다친 것을 생각해보니 우스운지 피식 웃음을 내보이셨다.

한참을 일한 뒤 아버지께 가보니 배가 고프시다며 어머니 불러서 점심 차리라고 하셨다. 저멀리 밤따러 간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밥차려 달라신다고 큰소리치며 어머니를 불렀다.

고기를 구우며 무뚝뚝하게 식사하시는 아버지를 곁눈질로 보았다. 다리가 불편하셔서 못내 언짢으실 거란 생각이 들어 기분을 풀어드리기 위해 이런 저런 얘기를 꺼냈고, 얼마전에 누나가 큰 공연무대에 나가서 새로운 노래를 불러 많은 관심을 받았다는 얘기를 전해드렸다.

얼굴 표정은 그다지 변화가 없으셨지만 그래도 누나 얘기에 솔깃해 하는 눈치셨다. 다행히 아버지 앞에서는 다리를 다쳐 절룩거리는 모습을 안 보여드려 야단은 맞지 않았고 조용히 넘어간 날이기도 했다. 

올라간 이날 대추가 많이 열렸지만 아직은 색깔이 파란 대추가 많이 있어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다시 수확을 해야만 했다. 일주일 뒤쯤에 어머니가 부르면 다시 올라가기로 했다. 부지런한 아버지께서 발을 다치신 관계로 이날 대추수확 작업은 미진했지만, 나 또한 삔 발목으로 인해 절룩거려 어차피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만약 아버지께서 욕심을 부려 대추나무를 함께 털었으면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다리를 절며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될 뻔하기도 한 날이었다.

아버지께 한의원에 가서 꼭 침맞으라고 말씀드렸지만 완고한 아버지는 별다른 말씀이 없고 여전히 무뚝뚝하셨다. 어느정도 완쾌되셔서 대추나무를 털게 될 때쯤이면 다시금 얼굴이 환해질 거라 생각든다.

2년 전에 아버지께서는 수확한 대추를 한가득, 돗자리에 깔아놓고 흐믓한 모습으로 대추를 봉지에 한됫박씩 담아 여러 봉지를 만들어 주셨다. 봉지에 한되씩 담은 대추를 지인들에게 싼값에 팔라고 하시며, 모은 돈은 아들 경록이 통장에 용돈으로 넣으라며 근엄하고도 진지하게 말씀하시던 기억이 떠올랐다.

2012년도에 대추나무 수확하던 날 당시에 아버지께선 모아논 대추를 됫박으로 쓸어담으며 흐믓해 하셨다.
2012년도에 대추나무 수확하던 날당시에 아버지께선 모아논 대추를 됫박으로 쓸어담으며 흐믓해 하셨다.김도형

내게 팔라고 하셨지만 사실, 나는 당시에 대추를 한 사람에게도 못 팔았다. 다 팔아 봤자 하루 일당도 안나오는 액수였고, 친한 지인들에게 한 봉지씩 선물로 주기도 하고 아침 운동 뒤에 사람들과 대추를 나눠 먹은 것이 전부다. 아버지께는 달고 맛있는 대추인지라 사람들이 잘 사먹어 반응이 좋았다고 둘러 되며 흐믓하게 해드렸지만, 죄송스러운 마음이 연신 들었던 당시가 떠오른다.

사실 노동의 대가에 비해 밑지는 것이 대추따는 일이지만 아버지, 어머니는 나와 같이 대추를 따며 밭에서 함께 두런두런 얘기하는 것이 좋아서 부르신다. 게다가 직접 딴 대추로 수확의 기쁨을 나눠주시려는 생각에 늘 부르시는 마음을 잘 알기에, 난 언제나 바쁜 일이 있을지라도 뒤로 접어둔 채 즐거운 마음으로 예고개에 올라간다.

평생을 교편을 잡으시고 점잖게 살아오신 아버지께선 퇴직하신 후에 제2의 인생을 살고 계시는데, 무료할 새 없는 일상을 만드는 것이 바로 이곳 선산에서의 소일거리들이다.

아버지께서 퇴직하신 지 10여 년. 대추나무와 아들 경록이가 훌쩍 자라 세월의 빠름을 느끼게 해주기도 하고 아버지의 허연 머리카락이 많아지는 것을 바라보는 마음이 다소 안타깝기도 한 요즘이지만, 그래도 대추나무를 터시며 정정하게 일하시는 모습을 뵐 때면 내 마음 또한 즐거워 진다.

아들과 함께 자라온 예고개의 대추나무들은 세월의 흐름을 애누리 없이 보여준다. 대추나무가 10여 년 뒤가 되면 크게 자라 더욱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되어 기쁘기도 하겠지만 아버지의 나이 또한 더불어 먹게 되어 세월의 무상함 또한 느끼게 될 순간이 찾아 올거라 생각하니 쓸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탐스럽고 풍성하게 맺힌 대추들이 아버지의 연로한 얼굴을 더욱 밝고 화사하게 펴드리지 않을까.

다음번 대추나무 털때는 아버지께서 완쾌되어 생생하고 활기찬 모습으로 함께 털 수 있기를 바래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한국유통신문>과 <한국유통신문>의 카페와 블로그에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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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빨간이의 땅 경북 구미에 살고 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체감하고 공감할 수 있는 우리네 일상을 기사화 시켜 도움을 주는 것을 보람으로 삼고 있으며, 그로 인해 고맙다는 말을 들으면 더욱 힘이 쏫는 72년 쥐띠인 결혼한 남자입니다. 토끼같은 아내와 통통튀는 귀여운 아들과 딸로 부터 늘 행복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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