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기스럽게 뒤틀린 그녀의 복제물이 죽여달라 애원하자 울부짖으며 방 안을 태운다
20세기 폭스
죽여 달라 외치는 '내 모습'을 바라보는 '나'의 심정은 어떠할까. 내가 나를 태우는 심정 또한 어떠할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그녀'를 모조리 태운다. 실험체들이 들어 가 있는 모든 수중시험관이 깨지고 부수어진다. 유리 깨지는 소리는 마치 그녀의 흉부가 깨지는 소리와 같다.
세월호 사고가 터지고 벌써 다섯 달이 넘어갔다. 사건이 발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는 많은 국민들이 공감하며 아픔을 함께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지 않은데 끊임없이 이견이 발생한다. 이제 일상생활로 돌아가야 하니 "세월호 얘기 좀 그만하자"고 한다. 유행가조차 길거리에서 자주 들리면 지겨워지는 법, 그 마음을 헤아릴 수는 있다. 허나 밝혀지지 못한 진실 앞에서 방관하겠다는 이야기에 안타까운 것을 어찌하랴.
사건에 대한 올바른 수습에는 관심이 없으며 고통에 공감치 못하고 방관만을 일삼는 자들이 이따금 보인다. 그들은 방관 전에 진전 없는 논쟁과 조롱을 즐기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가벼운 유흥일지 모르겠지만 유가족들의 가슴은 찢어지고 있다. 책임 없는 언어의 돌을 방향성 없이 마구 던지고 있다. 누군가는 그 돌에 맞고 피를 흘리고 있다.
타인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리플리는 또 다른 '나'로 탄생된 수많은 복제물들을 들여다보며 절규한다. 그것은 나와 복제물이 '타자'가 아닌 '동일시'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곧 복제물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고 나의 고통은 복제물의 고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