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정치·대선개입 의혹 사건으로 기소됐던 원세훈·이종명·민병주 피고인에 대한 1심 판결문(앞)과 검찰의 공소장(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1부(재판장 이범균)는 9월 11일 세 피고인에 대해 국정원법 위반 혐의는 유죄를 선고했지만 가장 관심을 모았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이 판결에 대해 서기호 정의당 의원은 재판부가 검찰의 공소사실을 바꿔치기 하는 방법은 선거법 위반 혐의 공모에 대한 판단을 누락했다고 비판했다.
이병한
실제로 그랬다. 판결문을 찬찬히 살펴보면, 유죄 판결을 내린 국정원법 위반 부분에 대해서는 공소사실 인용뿐 아니라 이후 재판부의 판단에서도 명확하게 공모를 중심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137쪽부터 164페이지에 걸쳐 '공모관계 관련 주장에 대한 판단' 부분이 별도 항목으로 빠져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무죄 판결을 내린 선거법 위반 부분에서는 공소사실 인용에서부터 재판부의 판단까지 통틀어 공모라는 단어가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서 의원의 말이 계속됐다.
"이 판결문만 놓고 보면 검사가 공모공동정범으로 기소했는지를 알 수가 없다. 우리는 공소장을 보니까 아는 거지, 이것만 보면 검사가 공모공동정범으로 기소했는지, 단독범행으로 기소했는지, 공모공동정범에서도 어떤 형태로(순차 공모는 공모의 한 형태다) 공모했다는 건지, 검사가 아무 제시를 안 한 것처럼 되어 있다. 그냥 단순히 피고인 원세훈이 지시하여 이렇게 된 것으로 되어 있다. 설사 백보 양보해서 이것이 실수라 하더라도 매우 문제다."
- 앞부분 유죄 부분이나 다른 무죄 부분에서는 공모에 대해 정확히 기술하고 있고, 판단도 그에 따라 하고 있다."맞다. 그러니까 더더욱 실수로 볼 수 없는 거다. 왜 하필 핵심적으로 무죄 판단을 내린 선거법 부분에서 이런 누락이 발생했느냐는 거다."
- 왜 그랬다고 생각하는가."나는 그 이유의 단초를 여기서 찾는다."
서 의원은 판결문 185쪽을 펼쳐 중간을 가리켰다. 이 부분은 재판부가 제시한 선거법 위반이 성립되지 않는 9가지 이유 중 첫 번째였다. 좀 길지만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① 이 부분 공소사실은 피고인들이 국가정보원 심리전단 직원들에게 지시하여 제18대 대선에서 특정 후보자의 당선 또는 낙선을 목적으로 한 선거운동을 하였다는 것이므로, 피고인 원세훈에게 선거운동의 목적성 또는 범의가 있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판단요소는 피고인 원세훈이 국가정보원 직원들에게 선거운동의 지시를 한 사실이 있는지 여부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검사가 이 부분 공소사실에서 선거운동의 지시에 해당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 적시한 2010. 1. 22부터 2012. 11. 23까지 12건의 피고인 원세훈의 지시 또는 발언 내용을 살펴보더라도, 그 중 직접적으로 제18대 대선에 관하여 선거운동을 지시한 것으로 파악되는 부분은 찾을 수 없고... (이하 생략)" (1심 판결문 185쪽)서 의원은 말했다.
"이 부분은 9가지 무죄 이유 중 하나이지만, 이게 핵심이다. 나머지가 다 여기에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보듯 재판부는 핵심을 '원세훈의 직접적인 지시'로 바꿔버렸고, 그런데 그게 없으니 무죄,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공모 여부는 완전히 누락됐다."
"직접적인 지시는 공모의 한 부분일 뿐"- 그렇다면 공모냐 지시냐가 왜 중요한가."왜냐하면 지시는 공모의 여러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니까. 피고인 원세훈은 지시뿐 아니라 보고를 받고, 그러면서 감독하는 방법으로 공모를 한 것이다. 또 지시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느냐를 따졌는데, 공모에는 직접적인 지시뿐 아니라 간접적인 지시도 성립된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다른 요소들과의 연관성은 어떤지 등이 공모의 요소에 해당한다. 이 부분들이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 결국 공모가 더 큰 범위이고 지시는, 특히 직접적인 지시는 그 한 부분이다?"그렇다. 그런데 공소사실 인용부터 공모를 빼고 지시를 쟁점화 시켰고, 그런 직접적인 지시가 없으니 무죄, 이렇게 해버린 거다."
- 의도적이라고 보는가."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 처음 판결문을 볼 때는 이상했다. 어? 공소사실을 인용하는데 왜 빠져 있지? 뒤를 쭉 보니, 여러 차례 정독을 해보니, 의도적이라는 의심이 강하게 들었다. 미리 결론을 내려놓고, 정치관여와 달리 선거법 부분은 직접적인 지시가 없다는 점에 착안해 무죄 판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작업으로 보인다. 자신의 무죄 판결을 그럴 듯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 직접적인 지시란 게 대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인가."재판부가 보기에는 '대선에 출마한 문재인 후보를 낙선 시켜라'는 수준은 되어야 직접적인 지시라는 거다. 사람이 특정되고, 당선과 낙선이라는 구체적인 지시가 있는."
- 그러면 공모공동정범으로 기소된 상태대로 판단한다면 어떻게 되었어야 하는가."직접적인 지시가 없다는 것만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인 지시 내용들도 정리하고, 그 간접적인 지시사항에 대해서 같은 공동 피고인, 그리고 국정원 직원들이 그 지시사항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라는 부분도 판단해야 한다. 상명하복 관계가 철저한 국정원에서 원세훈이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을 때 직원들은 '아, 선거운동을 하라는 취지구나' 이렇게 받아들였을 수밖에 없다.
또 지시에 대해서만 볼 게 아니라 보고-지휘 계통을 통해 순차적으로 올라오는 보고들, 정치관여를 2009년부터 꾸준히 해온 사정들, 정치관여의 근본 목적이 그들이 종북세력으로 보는 사람들의 제도적 진입 저지였다는 점 등을 같이 봐야 한다. 그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 이렇게 공모의 법리로 전개하면 유죄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1심 재판부가 생각했다고 보는가."좀 다르게 이야기하면, 공모의 법리로 전개했을 때 무죄를 내리려면 검찰의 주장들을 하나하나 배척해야 하는데, 그렇게 일일이 합리적으로 배척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인터뷰를 한 날 저녁, 서 의원이 기존 글을 좀 더 쉽게 고쳐 썼다면서 다시 보내왔다. A4용지 9페이지 분량이었다. 그는 "좀 길지만, 관심 있는 법조인들만이라도 전문을 읽을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만큼 그는 판사 경험이 있지 않고서는 좀처럼 알아채기 힘든, 자신이 발견한 판결의 문제점이 중대하다고 보고 정확히 알리고 싶어 했다. 아래에 전문을 파일 형태로 싣는다. 서 의원의 비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37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공유하기
"1심 재판부, 원세훈 공소사실 바꿔치기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