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서북청년단. 1948년 5월 31일의 모습. 사진 속의 서북청년단은 미군이 주둔한 대한민국의 국회 앞에서 ‘소련군 철수’를 외치고 있다.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사실, 서북청년단은 부활해서도 안 되는 집단이지만, 부활하기도 힘든 집단이다. 왜냐하면, 해방 직후 그들의 광란을 가능케 했던 두 가지 핵심 조건을 재현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는, 강력한 정치적 후원이다. 독자적 무력이 없는데다가 38선 이북 출신인 서북청년단이 객지인 남한 땅에서 폭력을 자행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미군정의 든든한 지원 덕분이었다.
해방 직후에 주한미군은 친일 청산 및 통일을 추진하는 세력을 분쇄할 목적으로 친일파 및 서북청년단과 손을 잡았다. 미군은 특히 서북청년단을 도울 목적으로 월남민들의 남한 정착을 돕고 그들의 주거지를 각 도별로 배정하는 일에 간여했다. 또 서북청년단과 월남민들의 취업도 알선해주었다. 월남민들에게 주거와 직장을 마련해준 것은 좋은 일이지만, 미군정이 그렇게 한 것은 월남민 속에 포함된 서북청년단을 활용해서 미군에 대한 저항을 제압하고 한반도 점령정책을 완결하기 위해서였다.
이 점은 서북청년단의 4·3 항쟁 진압을 다룬 김평선의 논문 '서북청년단의 폭력 동기 분석'에 소개된 사례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에 따르면, 미군정은 서북청년단원 박아무개가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사무소에 근무할 수 있도록 알선해주었다. 그런데 박씨가 면사무소에서 쫓겨나자, 미군정은 그를 미 육군 제24사단 첩보부대인 CIC의 성산포 사무소 직원으로 기용했다.
이것은 미군이 박씨를 제주도에 보낸 본래의 목적이 취업 알선이 아니라 첩보 활동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군정이 어떤 목적으로 월남민들과 서북청년단을 지원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박씨처럼 미군 스파이로 활동한 서북청년단원이 많았다는 점은 김구 암살범 안두희의 증언에서도 나타난다. 국내 언론에서 수차례 보도된 것처럼, 죽기 전에 안두희는 자신을 추적하는 고 권중희 등에게 "서북청년단에는 미군 정보원이 많았다"고 털어놓았다.
"미군정 비호 아래 온갖 폭력, 불법행위 자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