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의 섬 강화도.
이승숙
강화에서 나고 자란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인 죽산 조봉암 선생을 기리는 비석도 있고 그 옆에는 강화 출신 의병장의 비도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강계포수비'라는 비석이 한 쪽에 우뚝 서 있다. 강계라면 우리나라 최북단인 평안북도 강계가 아니던가. 더군다나 사냥을 하는 포수들의 공적을 칭송하는 비석이라니,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강계 포수들을 기리는 비가 강화도에 있는 걸까.
지금으로부터 148년 전 가을에 강화도는 큰 전란을 겪는다. 프랑스 극동함대 소속의 군함 7척이 사전에 선전포고도 없이 우리나라 영해를 침범했다. 그들은 서울로 통하는 강화를 점령해서 우리의 조정을 압박하고 통상을 허락받고자 하였다.
프랑스군이 쳐들어와 강화성이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급히 군사회의를 열어 순무영(巡撫營)을 조직했다. 순무영이란 지방에서 민란과 같은 변란이나 재난이 일어났을 때 왕명을 받고 파견되어서 해당 지역의 군무(軍務)나 민심 수습을 맡아 보던 병영을 말한다.
제주목사로 부임 중이었던 양헌수 장군은 순무영의 군사를 지휘하는 책임자인 천총(千摠)이 되었다. 양헌수 장군은 총을 잘 다루는 포수들 370여 명과 순무영의 병사들 백여 명을 합한 549명의 군사를 이끌고 서울을 출발해서 10월 18일에 강화도의 건너편인 김포 통진에 도착했다. 그러나 강화로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강화로 건너가는 갑곶나루 인근이 프랑스군의 수중에 들어갔는지라 그들의 눈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김포 덕포진은 강화해협을 사이에 두고 강화도의 초지진, 덕진진과 마주보고 있는 군사 시설이다. 그곳은 프랑스군이 점령하고 있는 강화읍 갑곶진과는 꽤 거리가 멀어 몰래 강화도로 건너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양헌수 장군은 김포 덕포진에서 강화 덕진진 쪽으로 건너기로 정했다. 음력 9월 28일(양력 11월 5일) 밤에 기습 상륙하기로 날을 잡고 배 다섯 척을 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