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팔았던 음료수들정성스럽게 만든 식혜였는데 결국 식혜맛 때문에 망했다.
문세경
드디어 식혜를 장에 내 놓았다. 처음이라 옆에서 장사하는 아주머니들께 시식을 부탁했다.
"아니, 무슨 식혜 맛이 이래요? 이거 상한 것 같아." 그럴 리가. 삭히는 시간을 좀 지체했을 뿐 맛은 괜찮았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거기다 양도 많은데 쉬었다고 버릴 수도 없고.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다른 아주머니 한 분이 귓속말로 말해준다.
"소다를 좀 넣어봐요. 그러면 신맛이 좀 덜할 테니까."나는 "살았다"고 외치며 부랴부랴 소다를 사러갔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 식혜통을 들고 가서 소다를 넣었다. 거품이 순식간에 일었는데 그걸 걷어내니 아까 보다는 훨씬 맛이 좋아졌다. 이제는 팔아도 괜찮겠지, 하면서 다시 시식을 부탁했다. 신맛이 덜하니 팔아도 될 것 같다고 한다. 휴.
날씨가 더우니 시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은 식혜를 많이 찾는다. 신맛이 나지 않으니 아무렇지도 않게 컵에 식혜를 따라서 팔았다. 한 잔에 천 원. 어? 그런데 식혜맛을 보던 손님들이 두어 발 가지 않아 돌아왔다.
"무슨 식혜맛이 이래요? 이거 상한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어제 집에서 직접 만든 식혜인데...""아무튼 시큼한 맛이 나서 못 먹겠으니 다른 걸로 줘요.""알겠습니다. 미안해요." 아무 말 없이 먹는 사람도 있었지만 10명 중 8명은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돌아와 바꿔달라고 했다. 낭패다.
옷가게 지인은 식혜를 계속 팔다간 이미지만 나빠질 것 같다면서 버리라고 한다.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기로 했다. 화장실에 가서 식혜를 쏟아 부으며 거짓말 안 보태고 정말로 눈물을 떨구었다. 어떻게 만든 식혜인데...
식혜를 빼고 나니 냉커피를 많이 찾는다. 가끔은 미숫가루도. 오후 6시 장이 파할 무렵이 됐다. 가만히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자니 마음만 급하다. 아직도 통에는 2/3나 남았는데 저걸 언제 다 팔지? 안 되겠다 싶어서 손님을 끌기 위해 목소리를 동원했다.
"자~! 시원한 냉커피와 미숫가루 있어요. 한 잔에 천 원!" 어디서 이런 배짱이 나왔는지는 나도 모른다. 첫 장사인데 남으면 안 되니까. 남으면 버려야 하는데 자식같이 만든 저것들을 어떻게 버린담. 차라리 이렇게 해서라도 팔면 다행이지. 마지막엔 오기가 생겨 더 목소리를 키웠다. 냉커피를 주문한 아주머니는 내 목소리를 듣고서 "씩씩하긴 한데 목소리가 아기 목소리 같네요" 한다. 식혜를 버린 것도 모자라 이제는 목소리까지 따라주지 않는 건가, 원.
거의 파장할 시각이 되었는데도 남은 음료수는 더 이상 줄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남은 음료수는 신고식도 할 겸 앞과 옆에서 장사하는 분들에게 돌렸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고 하면서. 그래도 반 이상이 남은 커피와 미숫가루는 결국 버리고 말았다.
모란시장은 5일장이므로 다음 장날까지는 4일을 쉬어야 한다. 노점 일을 해 본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다.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모란장은 4, 9일이니까 3, 5일 장날인 곳을 수배해서 가보라"라고 알려준다. "오케이"라고 했지만 다른 곳으로 가려면 자리가 문제다. 아무리 길에서 하는 노점이라도 내 마음대로 자리를 펴고 들어갈 수 없는 '원칙'이 있으니까.
모란시장과 날짜가 다른 시장을 알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대신에 메뉴를 추가하기 위해 경동시장, 명동, 종로, 신촌, 건대입구 등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노점에서 일한다는 것은 '한여름 뙤약볕'과 '장마철'이라는 최악의 조건을 동반한다. 추가메뉴를 정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 일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친구는 "노점에겐 여름이 죽음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으니까.
'세상에 쉬운 일은 없구나'를 뼈저리게 절감하면서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무한리필', '부족하면 더 드립니다'라는 문구를 붙이기로 한 것이다. 300ml컵 한 잔에 천 원을 받고 파는데 남으면 안 되니까, 그리고 '사람들이 먹어봤자 얼마나 더 먹겠어'라는 생각이었다. 비장의 카드는 별로 효과가 없었다. 컵을 들고 와서 더 달라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