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신의 신전툴룸에서 가장 큰 건축물(엘 카스티요)인 바람신의 신전은 유카탄의 표지를 장식하는 단골 손님이다. 그 절벽 아래에서 즐기는 수영이야말로 일생에 두 번 오지 않을 짜릿한 경험이 아닐까.
김동주
마침내 해안선을 돌아 멀리 신전의 모습이 보이자 나는 '헉' 소리를 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뒤늦게 도착한 황이 내 어깨에 매달린 카메라를 툭 치기 전까지, 나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것조차 잊었던 것 같다. 그제서야 사진을 찍기 시작했지만 오묘한 바다 색, 부서지는 파도, 신전의 절반을 덮은 열대나무, 깎아지른 절벽의 장엄함에서 오는 감동을 카메라에 담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느껴보는 느낌이던가.
신에게 제물을 바치던 제단으로 사용된 신전의 절벽 아래에서 설탕 같은 백사장을 점령하고 있던 사람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사진 찍기보다 직접 그 해변을 밟는 것을 택한다. 마야인의 신전이 내려다보고 있는 절벽 아래에서 해수욕이라니. 세상에 이보다 더 환상적인 해변이 있을까. 스페인의 침략으로 황폐해져 도시에는 바람만이 나부끼지만, 그들도 이 아름다운 바다를 어찌하지는 못했으니 말이다.
'여인의 섬'에서 마주친 숨 막히는 뒤태의 여인
여행의 마지막 날은 대책 없이 센티멘탈해진다. 칸쿤에서도 그랬다. 준과 떨어진 후로, 헤어지는 것에 진절머리가 났던 나는 언제나 혼자이기를 자초했다. 고작 일 주일이 채 안 되는 시간을 함께 했던 황과 택근형과의 마지막 날은 그래서 더욱 감상에 젖었다.
황이 쿠바를 향해 먼저 떠났다. 택근형은 며칠 후 다시 쿠바에서 황과 재회한다. 그곳에서 만날 사람이 있는 여행자처럼 행복한 사람이 또 있을까. 모처럼 감동을 함께 나눌 파트너를 잃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역시 두 달 뒤,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슬라 무헤레스로 가는 길이슬라 무헤레스로 가는 보트 위에서는 바다 건너 칸쿤의 해안선을 장악한 거대 리조트 장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골프카트는 이슬라 무헤레스의 상징!
김동주
아침에 황을 떠나보내고 오전 내내 숙소에서 널브러져 있던 형과 나는 칸쿤에서 13km 떨어진 이슬라 무헤레스(Isla Mujeres)을 찾았다. 보트로 고작 30분 걸리는 그곳으로 가는 내내 바다 길 건너 칸쿤의 호텔 장벽을 보고 있으니 이슬라 무헤레스라고 별다를 것이 있을까 싶었지만, 막상 도착한 그곳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화려한 고급 외제 차 대신 도로를 점령한 골프 카트와 편안한 차림의 사람들, 골목에는 곱게 채색된 낮은 주택들이 엉켜 있고 한 집 건너 하나씩 있는 가게에서는 누구라도 멕시코 사람으로 만들어 줄, 온갖 장식품을 팔고 있었다. 칸쿤이 반짝이는 하이힐이라면 이슬라 무헤레스는 발에 딱 들어맞는 편안한 슬리퍼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대체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알 수 없지만, 자동차로 움직이기에는 너무 작은 이 섬에서 골프 카트로 이동하는 것은 정말이지 신의 한 수라고 해도 좋았다. 통역가이자 협상가이던 황이 없으니 이번에는 택근형이 카트 대여상과 협상을 시작한다. 일부러 사람 좋게 생긴 가게 주인을 고르기까지 했으나 어차피 투어를 시작하기에는 늦은 시간에 섬 안에 비어 있는 카트는 드물 거라던 그는, 형의 그늘진 주름을 보고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픈카를 타고 환상적인 빛깔의 해안을 따라 달리는 기분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낭만적이다.
김동주
결국 제 값인(?) 500페소를 내고 빌린 탓에 잠시 속상했지만, 카트가 바람을 가르자 금세 환호성을 질렀다. 아무도 없는 도로변의 야자수와 계속해서 펼쳐지는 카리브 해를 따라 때로는 가로수 아래를, 때로는 숲을 가로 질라 계속해서 달렸다. 할 것이라고는 마음에 드는 곳에 내려 마음껏 바다를 보는 것뿐이었지만, 무헤레스 섬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곳이다.
섬의 남쪽 해안 끝에서 아득한 시절 세워진 마야 유적의 옛터를 찾아 향수에 젖고, 거친 파도가 치는 동쪽 암벽 해안을 따라 달리던 우리는 마지막 카리브 해가 될지도 모르는 어느 해변에 닿았다.
▲이슬라 무헤레스의 원래 뜻인 '여인의 섬'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이곳에서 미녀를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김동주
울창한 숲과 야자나무 사이로 살짝 모습을 드러낸 그곳은 칸쿤과 비교하면 한없이 한적한 바닷가였는다. 바닥은 온통 새하얀 모래밭이어서 아름답게 자라난 열대의 나무 위로 설탕을 뿌린 듯이, 눈부신 바다 빛에 마음을 송두리째 뺏길 지경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여인의 섬'(이슬라 무헤레스) 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도 모른다.
전혀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이슬라 무헤레스에서 '미녀'와 마주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이름 모를 해변에서 본 한 여인이 꼭 그랬다. 처음에는 시시하다는 듯이 그저 손에 턱을 괴고 서있기만 했다. 그러다 일순, 첨벙 바다에 뛰어들더니 다시 뭍으로 올라오기를 반복했다.
어쩌면 그녀에게도 오늘이 마지막 카리브 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젖은 머리를 풀고 그녀가 양팔을 벌리던 그 순간, 나는 어쩔 수 없이 셔터를 눌렀다. 세상에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서만 전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이별마저도 아름다웠던 카리브해의 낙조.
김동주
해질녘이 되어 다시 칸쿤으로 돌아가는 배를 타기 전, 선착장 근처의 눈부신 풍경을 보는 행운을 얻었다. 그저 '아름답다'하고 보트에 오르려고 하는데 순간 아차 싶었다. 나는 지금 카리브 해와 이별을 하는 중이었다. 그것도 너무도 담담하게. 하늘에는 몰려온 기러기 떼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했는데 마치 이 아름다운 낙원을 두고 또 어디론가 떠나야만 하는 여행자를 위로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렇지 않으면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머물고 싶은 마음이 교차하는 여행자를 유혹하는 손길이었을지도.
그날 밤 나는 지구 반대 편에 있을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고 그 때를 회상하는 대신, 밤이 떠나가도록 택근형과 술을 마셨다. 아무려면 어떠한가. 여기는 먹고 마시다 죽기에 딱 좋은 칸쿤인 것을.
간략여행정보 |
유카탄 반도(Peninsula Yucatan)라고 불리우는 남부 멕시코는 중앙 아메리카가 시작되는 지점에 속한다. 그 핵심은 칸쿤이지만 칸쿤의 호텔 장벽만으로는 아쉬운 사람들은 유카탄 전역에 흩어져 있는 마야 유적지와 해변을 찾아 다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곳이 바로 툴룸과 이슬라 무헤레스다.
각각 칸쿤에서는 버스로 2시간, 배로 30분이 걸려 하루 만에 다녀올 수도 있거니와 화려한 휴양도시인 칸쿤과 달리, 원초적 자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마치 다른 세계와도 같은 풍경을 선사한다. 연중 여름인 유카탄 반도의 특징 때문에 특별한 방문시기가 필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멕시코의 대학생들이 방학을 하는 8월과 1월에는 버스티켓을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으니 칸쿤에 도착하자마자 툴룸으로 가는 버스티켓부터 확인하는 것이 좋다.
툴룸 버스터미널에서 유적지까지는 10분거리니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좋으며, 이슬라 무헤레스는 여럿이 가서 정원 4인인 골프 카트를 빌리자. 카리브해를 향한 일탈의 기분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자세한 툴룸 여행정보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자. http://saladinx.blog.me/30156208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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