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소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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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가 말한 네덜란드 위안부 문제는 1944년 스마랑 사건을 가리킨다. 이 사건은 일본이 미국·영국 등을 상대로 동남아·태평양 지역에서 태평양전쟁(대동아전쟁, 1941~1945년)을 벌이는 중에 발생했다.
일본군은 인도네시아에서 납치한 17~28세의 네덜란드 여성 35명을 위안부로 전락시킨 뒤,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있는 스마랑 근처의 위안소에서 이들을 강간했다. 일본은 이 행위를 매춘이라고 강변했지만, 강제로 끌려온 여성들이 과연 자유의사에 따라 매춘을 할 수 있었을까.
16세기 이래로 네덜란드는 후추 무역을 목적으로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동남아시아에서 착취 활동을 전개했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 사람들이 인도네시아 등지에 진출하게 되었다. <하멜 표류기>의 주인공인 네덜란드인 하멜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본사가 있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동아시아 무역 전담 기구)에 취직한 뒤, 1653년에 일본 나가사키로 가다가 폭풍을 만나 제주 해안에 표착했다.
이처럼 16세기 이래로 네덜란드인들이 동남아에 거주했기 때문에, 태평양전쟁 중에 일본이 이곳에서 네덜란드 여성들을 강제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처음에는 동아시아 여성들을 인도네시아 위안소에 배치했다. 그러다가 다급해지자 네덜란드인들까지 강제 동원하게 된 것이다.
1945년에 일본이 패전한 뒤에 스마랑 사건은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에서 열린 국제전범재판에 회부됐고, 일본군 장교 일곱 명과 군속 네 명이 1948년에 유죄판결을 받았다. 책임자인 오카다 게이지 육군 소좌(소령)는 사형을 받았다. 일본 정부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세계 49개 나라와 일본 간의 제2차 세계대전 강화조약)에서 전범재판의 판결을 수용했다.
이것은 일본 공권력이 위안부를 강제 동원했음을 공식적으로 시인한 것이었다. 또 여성들이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됐다는 일본측 주장이 거짓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고노 담화를 허물어뜨리려는 아베 신조 총리의 행보에 제동을 걸기에 충분한 것이다.
일본사회가 무언가에 쫓기고 있다는 증거시오노 나나미 같은 일본 우파 지식인들은 아시아 여성뿐 아니라 유럽 여성까지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됐다는 게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면, 반일 연대가 동아시아 차원이 아니라 세계적 차원으로 확대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갖고 있다. 그래서 시오노 같은 지식인이 역사 작가의 자세를 스스로 허물면서까지 진실의 은폐를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그만큼 일본 사회가 무언가에 쫓기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또 동아시아들의 사과 및 배상 요구는 아랑곳 않으면서 서양 국가들 앞에서는 벌벌 기는 일본인들의 심리 구조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