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방법원
강은경
법정으로 가는 길, 머리를 스쳐간 법정영화들3일 아침,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서울 지하철2호선 교대역에서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걸어가는 동안, 전에 봤던 법정영화들이 떠올랐다. 소수자들의 인권을 다룬 <필라델피아>,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음모론을 다룬 <JFK>, 군대의 비리를 폭로하는 <어 퓨 굿 맨>, 부패세력과 싸우는 <스미스 워싱턴에 가다>, 그리고 최근에 본 한국영화 <변호인> 등등...
나는 법정영화를 좋아한다. 특히 거대 권력, 거대 부정과 맞서 투쟁하는 싸움판이 흥미진진하다. 치열한 논쟁과 법리다툼의 끝, 그 반전의 끝은 "역시 정의가 승리한다"는 감동이다. 법정영화는 그 감동을 열렬하게 선사하는 '결말'이 최고다. 아무렴, 얼마나 통쾌한지, 얼마나 머릿속이 개운해지는지...
나는 과연 영화가 아니라 현실의 법정에서 그런 통쾌한 감동을 맛볼 수 있을까. '반전'을 기대해도 될까. '역시, 대한민국은 살만한 곳이야! 정의가 살아있네!' 쾌재를 부르며 법정을 나서게 될까. 걷는 내내 쏟아지는 빗줄기처럼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낙관적인 결말을 기대하기에는, 날이 너무 어두웠다. 구름이 해를 가렸다. 빗발이 차디찼다.
'피고인 소환장'을 받은 날, 정수희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희씨를 처음 만나 곳은 서부경찰서의 유치장 안이었다. 2008년 6월 25일, 같은 장소에서 연행된 후. 그 전까지는 서로 생면부지였다. 당시 수희씨는 직장을 다니며 한 방송통신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말마다 행동마다 진정성이 뚝뚝 묻어나는 사람이었다. 정말 참되 보여, 끌렸다.
그렇게 유치장에서 맺은 인연으로 지금까지 만나는 사람들이 몇 있다. 4년 전, 내가 서울을 떠나 지리산으로 이사한 후로도 서로 안부를 챙겼다. 수희씨는 당시 유치장에서 풀려나와 100만 원 벌금형을 받았고,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그리고 열애 중이던 남자와 결혼을 했다.
오랜만에 전화로 화기애애하게 안부를 주고받았다. 수다를 떨다가 내가 "수희씨 재판 어떻게 끝났지?"하고 물었다.
"언니, 말도 마세요. 2심까지 2년 반 넘게 걸렸는데... 결혼하고 임신하고, 만삭의 몸으로... 또 아이를 낳고는 애를 데리고 다니며 재판을 받았으니까요. 마지막 공판 날에는 아이가 많이 아팠는데, 맡길 데도 없고, 설사하고 토하는 애를 데리고 지하철을 타고 갔으니까. 정말 힘들었어요. 마지막 변론을 하는데 눈물이 펑펑 쏟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말했죠. 감정에 호소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정말이지 이게 무슨 일이냐고. 내 개인의 이익을 위해 집회에 나갔던 것도 아니고... 그런데 아픈 아이 데리고 법정에 서야 할 만큼, 내가 무슨 죽을 죄를 진 거냐고... 왜, 사람이 사람 말을 안 믿어 주냐고. 내가 울어서 그랬나, 그때 재판장이 당황한 기색으로, 피고의 말을 못 믿는 건 아니라며 얼버무리는데... 결국, 2심에서 벌금 절반 깎이고 끝났어요. 줄기차게 무죄 주장을 했지만 씨도 안 먹히는 분위기였고... 사실, 너무 지치기도 했고 판결이 또 정치적일 게 뻔해 보여, 3심 청구(대법원 상고)는 포기했죠. 언니는 이제 시작? 힘내세요!" 또 다른 연행자들의 재판은 어떻게 됐을까 궁금했다. 전모씨에게 전화를 넣었다. 그는 2008년 당시, 촛불집회의 첫 연행자들 중 한 명이었다. 200만 원 벌금형을 받고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여섯 번의 재판을 거쳐 1심 최종선고를 앞두고 있다고 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도착할 무렵, 비가 그쳤다. 날은 여전히 칙칙한 회색빛으로 무거웠다. 나는 곧장 서관 법정을 향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각 법정 앞 복도 의자에는 증인인지 피고인인지, 사람들이 죽 앉아 있었다. 살면서 피해 가야 할 곳이 경찰서와 법원이라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