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괴산의 화양계곡 가는 길
화양계곡을 따라 화양구곡이 펼쳐짐
박태상
충북 괴산은 신라 때는 고을명이 괴양군이었으나 고려로 오면서 괴주군이 되었다가 조선조에 와서 괴산군으로 정착되었다. 고을 이름을 전통적으로 괴산으로 한 이유는 산수절경이 빼어나기 때문이었다. 자연 외경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고을 사람들의 마음도 따뜻하고 인자해서 군의 지정나무인 느티나무처럼 고즈넉한 성품을 지녔다.
괴산의 많은 인물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우암 송시열과 일완 홍범식 그리고 벽초 홍명희이다. 우암은 외가인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무덤이 현재 괴산의 청천면에 있어서 괴산을 대표하는 인물로 거론된다. 송시열은 친가인 회덕으로 8살 무렵에 갔으며, 친족 송이창의 아들 송준길과 친교를 맺었다.
열 살 무렵부터 부친 송갑조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부친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인물이 주자와 율곡이었으므로 우암도 평생 주자와 율곡을 추종했다. 정묘호란 후 부친이 죽자 우암은 율곡의 제자인 감장생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스승이 사망하자 그 아들 김집의 문하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27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장원급제한 송시열은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송준길과 영남을 유람하면서 세상을 배우려고 노력하였다.
얼마 있다가 효종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나중에 청나라의 볼모에서 풀려난 효종은 임금이 된 후 스승을 가까이 두려고 했다. 우암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기 위해 '기축봉사'를 올려 북벌론을 주창했다. 효종은 여러 차례 송시열에게 벼슬을 내렸으나 늙으신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결국 효종의 강권에 못이겨 이조판서에 올랐으나 효종이 급서하여 자신의 정책을 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