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로가 온통 돌로 되어 있어 걷기도 힘이 들지만 초행자는 길을 찾을 수가 없는 정수사 뒤편 산길
정만진
주차를 한 다음 조금 올라가니 '정수사 500m'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 여기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그런데 문제는 능선에 이르는 두 등산로 모두가 육안으로 찾을 수 없는 길이라는 점이다. 흙길이 아닌 까닭이다. 온통 크고 작은 바위 사이사이로 찾아다니며 걸어야 하는 돌길인 탓에 사람의 발자국 흔적은 자취도 없다.
만약 등산화도 신지 않은 상태라면 무조건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 실제로 올라보면 왼쪽 길이 훨씬 더 가파르다. 하지만 이 등산로를 처음 가는 사람이 그 사정을 예측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왼쪽으로 접어든 사람은 가파른 돌길을 오르고 또 올라 능선에 닿는다. 오른쪽으로 들어간 사람은 말안장처럼 푹 꺼진 능선의 네거리에 일단 닿았다가 다시 왼쪽으로 능선을 타게 된다. 오른쪽 길은 더 멀지만 상대적으로 왼쪽 길보다 평탄하다. 두 길이 다시 만나면 그때부터는 정상으로 가는 험악한 바위 능선으로 변한다.
가파른 바윗길을 일상적으로 오르고 내렸던 등산 애호가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도시 주변의 야산 정도를 다녀본 게 전부인 사람은 이제 약간 겁을 먹는다. 본래 산은 위로 올라갈수록 오랜 비바람에 씻겨 흙이 없어지고 바위들만 남는 법이다. 하지만 능선 자체가 이렇게 나무도 없이 거대한 바위들로만 이루어진 산은 보기 드물다. 국민관광지의 안내판에도 정수사 쪽 등산로에 대한 안내는 없었다.
▲정상 턱밑의 험악한 등산로
정만진
▲"위험" 표시가 없어도 저절로 몸이 사려지는 정수사 쪽 등산로
정만진
'위험' 입간판이 서 있다. 하지만 거의 쓸모가 없다. 위험 경고판이 없더라도 모두들 조심조심 걸을 수밖에 없는 좌우 절벽길이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왼쪽도 천 길 벼랑이고, 서울 방향인 오른쪽도 아찔한 낭떠러지다. 저절로 발바닥에 힘이 들어간다. 지나가는 하산 일행 중 한 사람이 "1년 등산 오늘 다했다, 이렇게 험한 능선은 내 생전 처음 본다!"하고 고함을 지른다. 그의 표정과 말투에 웃음기가 넘쳐 우리는 잠깐 유쾌해진다. 문득 온몸의 피로가 풀려나가는 느낌이다.
▲마니산 정상부로 오르면서 내려다 보는 풍경. 아직 안개가 덜 가신 탓에 시야가 흐리다.
정만진
마니산 참성단 |
마니산 정상에 있으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린 제단이라고 전해온다. 고려 원종 11년(1270)에 보수했으며, 조선 인조 17년(1639)과 숙종 26년(1700)에도 고쳐 쌓았다. 여러 번 고쳐서 쌓았기 때문에 최초의 모습은 찾아보기는 어렵다. 제단은 자연석으로 둥글게 쌓은 하단(下壇)과 네모반듯하게 쌓은 상단(上壇)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둥근 하단은 하늘, 네모난 상단은 땅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경주의 첨성대와 비슷하다.
고려와 조선왕조는 때때로 이곳에서 도교식 제사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단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참성단을 단군시대의 종교와 관련시켜 이해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일제강점기에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大倧敎)가 생기고 난 이후에는 민족의 성지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강화군청 홈페이지의 설명을 잠깐 보자. 지금도 해마다 개천절에 제천행사가 거행되며, 전국체전의 성화는 이곳에서 태양열을 이용하여 붙이고 있다. 참성단이 과연 단군의 제천단인지는 단정할 수 없으나, 고려시대에 국가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던 만큼 제전(祭田)이 지급된 것은 물론이다. 고려 원종은 참성단의 의례를 직접 주재하기도 하였다. (강화군청 홈페이지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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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글의 주제로 돌아가야겠다. 10월 3일에 오를 전국 최고의 등산지는 마니산 참성대라는 제안에 충실한 글을 써야겠다. 평범한 날에 마니산을 오르는 것도 괜찮지만, 10월 3일에 마니산 참성대에 오르면 위의 사진과 같은 광경들을 볼 수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 아닌가? 마니산 참성대, 시간이 허락한다면 10월 3일에 오르는 것이 금상첨화라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