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청문회
매직하우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고르게 존경받고 있는 인물은? 바로 백범 김구다. 아마도 10만 원 권 지폐가 발행된다면 그 인물로 김구가 유력하게 거론될 것이다. 때문에 그동안 김구에 대해서 비판을 하려면 그 근거를 따지기도 전에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선이 많았다.
그래서일까? <김구 청문회>(총 2권, 매직하우스 펴냄)를 통해 김구라는 성역에 흠집을 내고자 하는 저자 김상구는 재야의 학자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는 이 책 추천사에서 "보수에게는 물론 진보의 상당 부분에도 김구는 그야말로 손 댈 수 없는 신화 그 자체"라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김구의 정치 인생에서는 분명히 진보로서도 긍정할 수 있는 부분들은 있다며 "외교노선의 이승만과 달리 김구는 더 급진적인 항일투쟁노선을 견지한 것도 그렇고, 예컨대 1947년 12월 중순부터 김구가 돌연히 지지하게 된 남북연석회의 등 분단을 예방하려는 움직임들"을 거론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1920년대 초반부터 분명해진 김구의 거의 맹목적이다 싶은 반공 성향"을 필두로 "박정희 시절 김구의 정책적 영웅화 이외에 이광수라는 또 한 명의 반공주의적 민족주의자가 윤문한 <백범일지> 역시 '국민 독서'가 돼 우리로 하여금 독립운동의 역사를 김구의 눈으로 보게 한" 것이 김구를 성역화했다고 봤다.
<김구 청문회>의 부제는 '친일파가 만든 독립영웅'이다. 저자 김상구는 해방 이후 정국에서 이승만의 반민족적·반민중적 행위에 대한 김구의 저항을 제대로 찾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김구는 친일파들로 이루어진 한민당에게 수많은 자금을 받고 그들과 결탁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근거로 부일협력 재벌 최창학에게 제공받은 김구의 거주지 경교장(죽첨장), 친일파 송진우에게 받은 900만 원, 삼양사 창업주인 친일파 김연수에게 받은 700만 원, 그리고 '주석 김구 각하'로 극존칭을 써가며 김구와 임시정부 홍보에 앞장섰던 <동아일보> 등을 언급한다.
도발적 문제제기가 아닐 수 없다. 아래는 <김구 청문회>에 실린 주요한 문제제기를 정리한 것이다.
[논란1] 박정희가 김구를 '민족영웅'으로 만들었다?독자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김구를 독립영웅으로 만든 이가 다름 아닌 박정희'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에는 김구의 아들 김신이 있다.
김구의 아들 김신(공군 중장)은 박정희와 함께 5·16 쿠데타를 주도했으며 유신독재 시절 박정희 곁에서 함께했다. 이런 사안에 연좌제를 적용해 김구를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또 김신이 아버지 김구의 고귀한 뜻을 버리고 만주군 장교 출신의 박정희에게 협력했다는 시각과 함께 김구의 뜻이 김신의 선택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저자에 따르면 아무튼 "김구의 아들 김신이 박정희의 쿠데타에 일조함으로써 얻게 된 과실은 엄청났다". 김신 개인의 일신영달과 가족들의 기득권 진입은 차치하고라도 아버지 김구가 진보와 보수, 여와 야의 경계와 상관없이 대다수 국민이 숭배하는 민족의 영웅이 되었다.
실제로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백범 김구를 적극적으로 민족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남산에는 백범광장을 조성하고, 1962년에는 김구에게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대한민국장, 건국훈장 1등급)을 수여했다. 훈장심사는 이병도, 신석호 등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을 올린 친일사학자들이 주도했다.
김신은 1962년 공군참모총장직을 예편하고 타이완 주재 대사로 부임해 8년간 일했다. 1971년 귀국한 김신은 대통령의 권유로 공화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했으나 낙선한다. 하지만 그후 교통부 장관을 거쳐 유신시대에는 대통령 추천으로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이 된다. 그리고 독립기념관 초대 이사장을 거쳐 백범김구기념관 관장 및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을 지냈다.
[논란2] <백범일지>는 '친일파' 이광수가 윤문했다?김구를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백범일지>를 친일파 문인 춘원 이광수가 윤문 각색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일 것이다. 전 국민의 필독서로 자리잡은 <백범일지>는 유려한 문장, 쉽고 간결한 문체로 출간되자마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백범 개인의 일생도 흥미롭지만, 상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지사들의 행적을 파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책이기 때문이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김지림군과 삼종질 흥두가 편집과 번역, 철자법 수정 등 궂은일을 했다"고 썼다. 때문에 오랫동안 김지림이 <국사본백범일지>의 윤문자로 알려졌다. 하지만 김구의 아들 김신은 이광수가 윤문자임을 고백한 바 있다.
"춘원은 자신이 그 일을 하겠다고 했답니다. 아버님은 그의 행실 때문에 망설였는데, 누군가가 글 솜씨도 있는 사람이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맡겠다니 시켜보라고 했대요. 그가 윤문을 한 것은 사실이나, 아버님이 그걸 알고 맡기셨는지 의문입니다." - 최일남이 만난 사람-김신씨: 백범은 왜 단정을 반대했는가, <신동아>1986년 8월호, p.347 <백범일지>는 이광수의 윤문을 거치면서 전국민의 교양서로 자리잡았다. 아래 두 문장의 차이를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여등(汝等)은 아직 나이가 어리고 또한 반만리 중역(重域)을 격(隔)하여 그 때마다 이야기하여 줄 수도 없으므로 시시(時時)로 설여(說與)할 수도 없으므로…" "아비는 이제 너희가 있는 고향에서 수륙 오천리를 떠난 먼 나라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어린 너희를 앞에 놓고 말하여 들릴 수 없으매…"앞의 글은 김구의 아들 김신이 지난 1994년 백범 친필본을 공개한 뒤 집문당에서 영인본을 발간하고, 그것을 윤병석이 직해(그대로 해석함)한 책에서 가져온 것이다. 아래 글은 1947년 도서출판 국사원에서 최초로 출간한 <백범일지>에서 따온 글이다.
대부분 처음 글은 어렵다 못해 난해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글은 국한문 혼용 시대였던 1947년에 발간되었음에도 문체가 대단히 유려하다.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논란3] 김구는 정치적 위기 때문에 김일성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