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지리산에서 맑고 깨끗함으로 금대암과 더불어 손꼽혔던 벽송사는 벽송 지엄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층 석탑의 양식으로 미루어 절의 창건 시기를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로 보기도 하고, 다만 조선시대에 통일신라 양식으로 석탑을 만들었을 뿐 실제 절은 벽송 지엄대사 때인 1520년에 창건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아무튼 벽송사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하여 도를 깨달은 유서 깊은 절이다.
조선시대 불교의 선맥(禪脈)에서 보면 벽계 정심, 벽송 지엄, 부용 영관, 휴옹 일선, 청허 휴정(서산), 부휴 선수, 송운 유정(사명), 청매 인오, 환성 지안, 호암 체정, 회암 정혜, 경암 응윤, 서룡 상민 등 기라성 같은 정통조사들이 벽송사에서 수행교화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루었다.
아울러 선교겸수한 대 종장들을 108분이나 배출하여 일명 "백팔조사 행화도량"(百八祖師 行化道場)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벽송사는 한국전쟁 때 빨치산의 야전병원(일종의 환자 비트로 보기도 한다)으로 이용되어 국군에 의해 모조리 불타버렸다. 이후 절이 제 모습을 찾은 건 1960년대. 쇠락해질 대로 쇠락해진 사찰을 중창한 이는 지금의 서암정사에 계신 원응 큰스님이었다. 벽송사에는 신라 양식을 계승한 보물 제474호인 3층 석탑과 경남유형문화재인 벽송선사진영, 경암집 책판, 묘법연화경 책판과 경남민속자료 제2호인 목장승의 문화재가 보존되고 있다.
벽송사는 지리산둘레길이 지나는 곳이다. 이 길은 스님들의 포행 길을 내어준 것이다. 여행자도 이날 금계-동강 구간을 걸었다. 벽송사에서 산길을 출발하여 용유담을 구경한 후, 둘레길 버스를 타고 추성동에서 내려 1km 정도의 비탈이 심한 아스팔트길을 걸어올라 다시 벽송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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