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교와 교회 둘 중 교회와 관련된 문화재이다.
이성애
1학년 땐 주로 교양과목으로 커리큘럼이 짜여진 까닭에 전공임에도 '스페인어' 공부는 많이 못했단다. 차라리 2주간 스페인 여행을 통해 말을 많이 익혔다는 걸군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좋다. 그런 걸군을 응원하고 격려하는 차원에서 남편과 상의 후 점심 한 끼를 사주기로 했다.
우린 스페인에서 여러 번 시도했던 바로 그 메뉴 '오늘의 요리'를 2개 시켰다. 어려운 건 없다. 영어가 안 통해도 그 사람들이 와서 "전채 요리로는 무엇을 먹겠느냐?"며 이것 저것 나열할 때 하나를 대충 말하면 되고, "메인 요리로 무엇을 먹겠느냐?" 하면 그땐 좀 성의껏 책에서 본 듯한 메뉴를 말하면 된다.
자라나는 새싹, 스페인어라는 세계에 1년이란 에너지를 쏟은 걸군은 적극적으로 메뉴와 관련해 현지어로 종업원과 얘기를 했다. 현지어를 모르는 우린 그들의 대화를 효과음과 몸동작만으로 추측해야 했다. 아마도 그는 스페인 요리와 관련된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있는 듯 했다.
깊이 고민하지 않고 주문한 '오늘의 요리'에 대해 걸이 약간 변경하는 것 같은 광경을 흡족하고 마음 편하게 지켜보았다. 그간 경험을 떠올려 요리를 상상해 본다. 먹을 만한 전채 요리 2종류와 메인 요리 2종류가 나오겠지. 이 정도면 스페인 씨에스타 시간에 여유로움과 포만감을 느끼며 대화를 나누기에 적당할 것이다. 유명한 관광지의 멋스런 뒷골목 야외 테이블에서 사람답게 뭐라도 집어 먹을 생각을 하니 현대판 신선놀음이다.
음식 2개 먹고 계산하는데 금액이 '상상초월'드디어 요리가 나왔다. 전채 요리라고 하기엔 제법 양과 내용이 흡족했다. 닭고기 요리를 먹고 본격적으로 메인 요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게 끝이란다. 알고 보니 남편-걸-종업원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전채 요리를 시키지 않고 곧장 메인요리 2개만 시켰단다. 황당하지만 괜찮다. 우린 현대판 신선이니까.
"그래, 그럴 수 있지. 괜찮아, 아까 그 메뉴들의 전채 요리를 시키면 되지. 아까 그 메인 요리들의 전채 요리를 달라고 해봐요." 걸은 한동안 뭐라고 뭐라고 말을 했다. 또 우린 흡족했다. 그렇게 오징어튀김까지 먹고 신선놀음을 끝내고 코스요리 2개 값을 계산하려고 하니 금액이 상상초월이다. 잠깐의 소란 끝에 우린 알았다. 자라나는 새싹, 걸군이 헷갈려서 그만 메인요리 2개를 더 시킨 것이다. 결국 코스요리를 4개 먹은 경우가 되어 버렸다. 코스요리 2개면 될 것을 코스 생략하고 메인요리만 4개를 먹은 것이었다.
우린 상황을 이해했고 걸은 그때부터 소리없이 늙어갔다. 우리 테이블을 전담하던 종업원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자세다. 우리가 이의제기를 해본들 나아질 것 같지 않다. 그냥 우리의 정신적 에너지만 축낼 것 같다.
그래서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8만 원에 가까운 돈을 냈고 남편은 걸을 향해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경제관념이 어둡지 않은 편이라 돈을 규모있게 쓰는 남편이지만 "괜찮다"는 그의 말에선 진정성이 느껴졌다. 후배관리를 하며 한턱 쏘는 부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 먼 곳에서 만난 조국의 청년을 위해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진짜 괜찮은데...
맥주를 마셔 낮부터 얼굴이 벌게진 걸의 얼굴빛은 괜찮다는 말에도 검붉게 변했다. 걸의 되풀이하는 이 말 때문에 우린 지금 당장 여기서 헤어지는 게 상책임을 직감했다.
"제가 매일 바게트로 만든 샌드위치만 먹었거든요. 이런 비싼 음식은 먹어보지 못해서 잘 몰랐어요. 저 때문에... 비싼 음식은 잘 몰라서... 죄송해요." 우리도 그런 경험이 있던지라 그런 말을 하는 걸이 더 가여웠다. 자라나는 새싹인데 오늘 밤 자다가 경기할까 걱정되었다. 계산을 끝낸 후 후끈 달아오른 마음으로 우린 어느 예쁜 골목에서 작별인사를 했고 각자의 길을 갔다. 지금 속히 찾아야 할 건 유대인 거리가 아니라 평정심이다.
우린 정말 괜찮은데 이 일로 부정적 감정을 한 보따리 받은 걸군이 걱정되었다. 캠핑장에 돌아와서도 내내 걸군이 걱정된다.
"그래, 이 모든 게 다 식당 종업원 그 놈 때문이다."설명해 봤자 너무 복잡해서 설명하기도 뭣하지만 그래도 '고객 만족'을 생각한다면 분명히 자신이 바로잡거나 도와줄 여지는 충분히 있었어. 그럼에도 '잘 걸렸다'란 뉘앙스를 풍기며 그 이상한 주문을 꼬박꼬박 받아 적고 음식을 내온 놈. 우리의 희귀한 실수에도 음식 값을 전혀 할인해 주지 않은 놈. 그래서 이런 화창한 날 걸의 마음에 먹구름을 몰고 온 놈. 경비충당을 위해 당분간 리씨네로 하여금 현지식을 먹지 못하게 한 놈. 참 야박한 놈. 그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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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어 전공이라더니... 8만원짜리 점심을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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