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산업의 독점을 규제한 파라마운트 판결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할리우드 독점전쟁>
본북스
파라마운트 판결은 미국 정부의 반독점 소송의지를 대변함과 동시에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시스템 붕괴를 촉발한 기념비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이 때문에 한쪽에서는 영화산업을 침체시켰다며 부정적으로 보지만, 독립영화가 약진하며 미국 영화산업을 한 단계 성장시켰다는 긍정적인 시각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 판결이 영화산업 전반에 미친 영향이 상당히 컸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스크린독과점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파라마운트 판결에 주목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파라마운트 판결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고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온 판결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미국정부의 규제 완화 정책으로 이 판결이 사실상 사문화됐다며 대형 스튜디오의 극장 취득이 가능해 졌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파라마운트 판결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으며, 어떤 절차를 거쳐 판결이 이뤄진 것일까? 실제로 이 판결은 사문화 된 것일까?
궁금증을 명쾌하게 풀어주는 책이 나왔다. 장서희 변호사가 쓴 <할리우드 독점전쟁>이다. '파라마운트 소송 바로보기'라는 부제가 붙은 책은 파라마운트 소송의 시작과 끝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발단과 전개, 판결의 세부적 내용 등이 서술돼 있다. 이후 미국 영화산업의 변화 과정과 한국 영화산업의 현재를 비교하는 부분은 흥미있게 읽힌다.
책을 쓴 장서희 변호사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서울대에서 소비자학을 전공한 그는 석사과정을 마친 후 중앙대 영화학과와 영상대학원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영화를 전공히며 단편영화를 만들기도 했던 그는 이후 로스쿨에 진학해 법률을 공부한 후 지금은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소비자와 영화에 대한 전문지식을 법률과 연결해 영화와 관련한 역사적 소송을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메이저 스튜디오 배급과 상영 분리시킨 독립영화인들<할리우드 독점전쟁>에 따르면 파라마운트 판결을 나오게 만든 미국 정부의 반독점 소송은 1938년 대기업 스튜디오의 수직 독과점 체제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시작됐다. 파라마운트, 20세기 폭스, 워너브라더스 등 극장을 소유한 대형 스튜디오가 극장까지 소유하면서 횡포를 부렸기 때문이다. 가격 담합 공모, 끼워 팔기, 무시사 상영계약, 독립극장들에 대한 차별, 독립제작자들 배척 등이 문제가 됐다.
1938년 시작된 소송은 1948년 연방대법원 결과가 나오기까지 10년이 걸렸지만, 중간에 정부와 스튜디오 간의 절충이 있기도 했다. 1938년 소송은 1941년 동의판결로 일단락됐다. 동의판결은 소송당사자들의 합의를 통해 판결을 하지 않고 법원의 승인을 통해 소송을 종결하는 제도다.
미 법무부 독점금지국은 동의판결에 따라 이들 스튜디오들에 대해 3년 동안 제재를 유보했으나 1차 동의판결에 극장 분리가 포함되지 않으면서 독립영화인들의 불만이 커졌다. 찰리 채플린, 사무엘 골드윈 등의 영화인들이 1942년 독립영화제작협회를 만들면서 반독점운동을 펼쳐나갔고, 동의판결 이행 기간이 끝난 1944년 정부의 제재가 다시 시작된다.
미 법무부는 '거래제한 공동행위와 독점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법률'인 셔먼법을 바탕으로 메이저 스튜디오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1946년 1심 법원인 뉴욕연방법원은 배급과 상영 영역에서 파라마운트 등 피고들의 셔먼법 위반을 인정한다. 다만 제작영역에서 경쟁법 위반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법원이 메이저 스튜디오들의 법 위반을 인정하면서도 극장분리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스튜디오들은 판결에 불만을 나타내면서 양측 모두 상소하게 된다. 1948년 5월 3일 미 연방법원은 파라마운트 판결을 통해 상영에 대해 독점 공모가 없다고 본 것과 극장 분리를 명하지 않은 판결에 잘못이 있다고 보고 재심리 취지로 1심 법원에 환송 판결을 내린다.
스튜디오들은 끝까지 법정 투쟁을 벌이고자 했으나 일부 스튜디오들이 이를 동의판결로 수용하면서 다른 스튜디오들에게 파급됐다. 뉴욕연방법원은 연방대법원의 환송취지에 따라 1949년 7월 독점 금지에 대한 개선책으로 극장의 분리를 명한다. 파라마운트 판결이 완결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