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구 동구학원(동구여중, 동구마케팅고) 정문.
권우성
서울 성북구에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운영하는 사학법인인 동구학원(이사장 조웅)에서 개학을 하루 앞두고 고3 담임인 교사를 파면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서울교육청이 긴급 감사에 나섰다. 동구마케팅고 안종훈(42) 교사는 이번 파면이 지난 2012년 학교 이사장과 행정실장의 비리 관련 민원을 교육청에 제기한 것에 대한 보복 징계라고 주장하고 있고, 학교측은 정당한 징계라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전교조와 사학바로세우기시민모임 등 교육시민단체들은 '내부비리 공익제보자에 대한 파면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책임을 묻겠다고 나섰다. 지난 19일 상문고와 인권학원 비리 척결 싸움을 하다가 해고된 한 해직교사는 "친일파의 후손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교육을 말하고 있고, 비리를 고발한 교사를 내쫓고 있다"고 동구학원을 맹비난했다.
동구학원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건 이번만이 아니다. 2008년 11월 동구여상(현재의 동구마케팅고)에서도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당시 동구여상은 교육청 예산으로 200여권의 도서를 구입하기로 했는데, 학교측은 국어·역사 교사들이 신청한 <친일파 99인> 등 3종의 근현대사 관련 책에 대한 구입 목록을 제외해 버렸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책들이라서 구입할 수 없다"는 학교측 해명에 교사들은 교권 침해이자 학생들의 학습권 침해라며 학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등 반발했지만, 동구학원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동안 이런 전례가 없어 의아해했던 교사들은 이사장 부친과 외조부, 설립자 등이 모두 친일 논란이 있는 인물들이란 사실을 확인한 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친일파 김활란이 학교 초대 설립자 중 한 사람동구마케팅고 홈페이지 '학교 연혁'을 보면, 이 학교 초대 설립자 중 한 사람이 김활란인데 이후 그는 이사장도 역임했다. 그런데 <친일파 99인> 책에는 이 김활란이 조선 여성들에게 학병과 징용, (일제 침략) 전쟁 협력을 종용한 친일여성으로 등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학도병 출진의 북은 울렸다. 그대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용약(勇躍) 떠나련다! 가라, 마음 놓고! 뒷일은 총후(銃後)는 우리 부녀가 지킬 것이다. 남아로 태어나서 오늘같이 생의 참뜻을 느꼈음도 없었으리라. 학병 제군 앞에는 양양한 전도가 열리었다. 몸으로 국가에 순(殉)하는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었다." - '뒷일은 우리가', <조광>, 1943. 12 친일파 방응모가 발간한 친일잡지 <조광>에 실린 김활란의 글을 보면, 그의 친일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초기 애국계몽운동에 나선 적도 있지만, 1936년 전후로 친일파로 변절해 1941년 태평양 전쟁 이후에는 야먀기 카쓰란(天城活蘭)로 창씨개명하고, 각종 강연과 저술 활동을 통해 학도병 모집, 징용과 전쟁에 협력하는 등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에 나섰다.
그러나 친일파 김활란이 동구학원의 공동설립자이자 이사장이었다는 것이 동구학원을 둘러싼 친일파 역사의 전부가 아니다. 김활란의 호가 우월(又月)인데, 이 호를 지어준 사람이 김달하라는 그의 형부(김활란 언니의 남편)이다. 동구학원의 또 다른 설립자이자 초대 교장인 조석봉이 이들의 사위이고, 현 조웅 이사장이 조석봉의 아들이니 조웅은 김달하의 외손자이다.
평북 의주 출신의 김달하는 일제 밀정(密偵)이었다. 그는 만주와 중국에 일제 밀정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가와 독립단체에 접근하여 정보를 캐내어 일제에 알려주거나 밀고하고, 이들을 회유하는 반민족 행위를 하다가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 단원들에 의해 비참하게 처단된 것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인물이다.
김달하와 김애란(김활란의 언니)이 낳은 딸의 남편(그러니까 김달하의 사위)이 바로 동구학원의 설립자이자 초대 교장으로 알려진 조석봉이다. 그의 아들이 교장을 거쳐 현 이사장이 된 조웅이다. 조웅 이사장의 아버지 조석봉 역시 친일 논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1941년 진주만 공습을 시작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1943년 조선에 징병령을 실시한다. 조선 징병의 시행을 앞둔 1942년(친일파 김활란과 조석봉이 학교를 설립한 해이기도 하다) 10월 친일잡지 <조광>에 '징병령과 여자교육'이라는 좌담회 기사가 실렸다. 일제가 조선청년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고, 조선 여성들이 이들을 지원하도록 하겠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우리의 고유한 미덕이 일본 여성들의 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