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10월 장준하의 49재를 맞아 열린 ‘장준하 추모의 밤’에 참석한 함석헌과 이희호, 김대중(앞줄 왼쪽부터).
장준하기념사업회
그런데 정말 의외였다. 면담 요청 공문을 보내면서도 성사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나 역시 생각했는데 불과 3일 만에 그쪽에서 돌아온 답은 뜻밖이었다. "공문을 보고했더니 대통령님도 하실 말씀이 있다며 가급적 빠른 시간 내에 방문하시면 좋겠다고 하신다"는 비서실의 전언이었다.
그야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소식이었다. 사실 성사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다고 여겨 별반 준비도 하지 않았던 나는 그제야 정신없이 면담 조사를 준비했고 그렇게 해서 의문사위 위원장님 등 핵심 간부와 내가 동교동 김대중 도서관으로 찾아간 날은 2003년 12월 18일이었다.
이날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면담은 약 1시간 정도였다. 먼저 김 전 대통령은 인사 말씀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거 독재정권하에서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고, 또 목숨도 바쳤습니다. 그런 분들에 대해서 우리가 지금 민주 유공자로서 명예를 회복하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희생자들 중에 가장 억울한 분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확인되지 못하고 진상이 밝혀지지 못해 '의문사'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는 사실은 돌아가신 당사자 영혼도 그렇고, 가족과 친구들 국민 전부가 참 통탄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면담 조사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알고 싶었던 것은 처음 장준하 선생님과 알게 된 인연부터였다. 김 전 대통령은 예상보다 더 명료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처음 그분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자유당 치하에서 사상계를 하실 때였고, 그러다가 좀 더 적극적으로 알게 된 것은 6대 국회 때 사상계가 어려워서 주식을 발행한다고 할 때 나도 많이 사들이고, 국회에서 다른 사람한테 권해서 사들이고, 돕고 하면서 자주 접촉하게 됐다"며 "그 후 1969년 '한비 밀수사건' 당시 그 양반이 '밀수 왕초는 박정희'라는 발언으로 잡혀 들어갔을 때 우리들이 석방운동을 하면서 친해졌다"고 말했다.
가장 핵심인 '그 날'에 대해 질문했다. 1975년 7월 29일, 장 선생님이 김 전 대통령의 집을 방문하여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한 3시간 반에 걸친 비밀 회동이었다. 놀랍게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 회동에 대해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간략한 진술이다.
김대중 前 대통령 : "7월 달에 장준하 선생이 찾아 오셨어요. 나는 그때 연금당해서 못 나가 가지고, 그때는 장준하 선생쯤 되면, 미행, 도청, 감시 이런 것은 당연지사니까 그렇게 됐었고. 내 기억에는 오찬을 같이 했는데 그때 유신 철폐에 대해 서로 심도 있게 얘기를 했어요. 장준하 선생이 이런 말을 한 것이 지금도 기억에 있어요.
자기가 이제 희생을 각오하고 싸우겠다. 그리고 당신한테 얘긴데, 사실은 나도 지금까지 어떤 대망을 가지고, 그래서 당신에 대해 라이벌 의식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포기했다. 대신 민주회복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겠다. 당신이 지금 연금 상태라서 움직일 수 없으니까, 나라도 움직여서 내가 하겠다. 우리가 힘을 합쳐서 이 일을 해내자. 그런 얘기를 했던 것이 기억에 있습니다.
그러면서 각계각층을 규합해 가지고, 민주화 운동을 하자. 그때는 유신체제하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성명서 한 장도 전부 불법으로 처리될 때고, 툭하면 사형선고 내리고 투옥되고, 장준하 선생도 그때 참 비장한 각오로 나섰다고 생각됩니다. 장준하 선생이 생명을 걸고, 민주주의 회복에 나섰고, 자기 목숨을 버리겠다는 그런 각오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그리고 그 모든 실무를 장준하 선생이 다 하기로 했습니다."
"장준하 등산, 말리지 못한 것 안타까워..."그러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면담 말미에 장 선생님 사건을 예감했던 당시 기억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며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난 후 요즘은 소일로 무엇을 하냐고 물으니 그 양반이 하는 말이 산에 다닌다고 하는 겁니다. 등산하면 건강이 좋아지고, 여러 가지 재밌다고 그런 얘기를 하길래. 그렇게 으슥한 산 속 다니다가 신변이 위험하지 않냐. 그렇게 얘기했더니, 사람들하고 같이 다니고, 지 놈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냐고. 그러는데, 그때 속으로 께름찍 하더라구요. 그때 장준하 선생을 둘러싼 분위기로 봐서는. 그래 가지고 한 달쯤 가니, 그런 사고가 생겼어요."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이 그때 보다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은 것은 안타깝다는 뜻도 비췄다. 장준하 선생님 사후 이처럼 결과론적으로 안타까움을 표시한 이들이 참 많았다. 조사팀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확인하고 싶었다. 장준하 선생님의 사망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개인적 판단이었다. 특히 장 선생님 사건 이전에 벌어진 그 일, 1973년도 8월 8일 김 전 대통령이 일본에서 납치되어 암살당할 뻔 했던 당사자로서 장 선생님 사망사건을 바라보는 눈이 남 다를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예상보다 김 전 대통령의 말씀은 더 강했다. 매우 확고했다. 그 전문이다.
"그 분이 평소에 어떤 사람보다도 박정희 정권에 대해 과감하게 투쟁했고 언동을 서슴지 않아 그것이 국민이나 지식인들에게 상당히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때 박 정권은 자기네 집권 계속에 지장이 되면 서슴지 않고 죽이는 거니까, 많은 사람 있지 않습니까, 인혁당 사건이라든가 여러 가지 있고, 나도 그 대상에 들어가고. 그러니까, 장준하씨가 그쪽에서 제거의 대상이 됐다고 해서, 하나도 이상할 일이 없어요."김 전 대통령은 말을 이어갔다.
"좌우간, 그때 사회 분위기, 정부 태도로 봐서 나나 장준하 선생은 제거의 대상인 것은, 말살의 대상인 것은 틀림없어요. 나는 구사일생으로 살았고, 장준하 선생은 희생이 됐는데, 저것이 꼭 기관에 의해서 했냐하는 것은 내 사건같이 확실한 증거는 없거든요. 내 사건은 확실히 나왔으니까. 여하튼, 그 시대에 장준하 선생에 대한 박해, 음모, 이런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 되겠다하는 생각을 가지고, 내 개인으로서는 이것이 그러한 독재정권에 의한 희생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돌아 가셨을 때도 내가 집에 가서 여러분들하고 얘기했는데...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님이 공인으로서, 그리고 한 국가의 대통령을 지낸 분으로서 이렇게 장준하 선생님의 사망 의혹에 대해 단호하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리라 예상하지 못했었다. 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님이 "나도 꼭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바로 '장준하의 죽음은 타살'이라는 확신이었다.
2012년 8월 발견된 장준하 타살 증거, 반드시 밝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