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홍 의사가 폭탄을 던졌던 조선은행 대구지점 건물이 흐린 날씨 속에 웅장하게 서 있다. 건물 오른쪽 도로로 50m가량만 들어서면 당시 도청으로 사용되었던 경상감영이 우측에 있고, 거기서 다시 왼쪽 맞은편에 헌병대(구 대구병무청 건물), 우편국(현 중앙우체국) 등이 있었다.
정만진
2014년 8월 15일, 흐린 날씨에도 '조선은행 대구지점' 건물은 웅장한 위용을 뽐내며 잘 서 있었다. 폭탄을 맞은 자취는 찾을 길이 없었다. 여느 날이면 하루 종일 북적댔던 대구 시내 중앙통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행인조차 거의 없었다. '국경일'을 '휴일'로 알고 모두들 시외로 야유를 나간 것인가?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드문드문 보이는 거리의 태극기뿐인 듯 느껴졌다.
조선은행, 식산은행 |
조선은행은 중앙은행으로, 현재로 말하면 한국은행이다. 그런가 하면 식산은행은 신용 기구를 통한 착취 강화를 위해 일본이 설립한 은행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실질적 관리를 했던 식산은행은 일제의 한국에 대한 경제 침략에 큰 역할을 했다. 식산은행의 주요 업무는 농촌 수탈에 자금을 대 주고 식민지 산업을 지원하는 일이었고, 은행의 일반 업무도 보았다. |
1927년 10월 어느 날, 오늘의 필자처럼 장진홍 의사도 이 건물 주위를 답사했을 터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한산한 것이 아니라 거리는 인파로 들끓었으리라. 불과 50M 인근에 경북도청(경상감영 자리)이 버티고 있고, 현 중앙우체국 자리에 대구우편국과 대구전신전화국이, 그리고 현 대구근대역사관 자리에 식산은행 대구지점이, 현 중부경찰서 자리에 대구경찰서까지 설치되어 있었으니, 조선은행 대구지점 주변은 정치과 경제 그리고 정보통신이 밀집된 대구 최대의 중심가였다.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 의사는 여관 사환 박노선에게 "내가 어제 다쳐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으니 이 벌꿀 상자들을 조선은행, 도청, 식산은행, 경찰서에 순서대로 급히 배달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벌꿀 선물로 위장된 네 상자에는 장진홍 의사가 직접 제조한 폭탄들이 들어 있었다.
박노선은 별 의심 없이 상자들을 들고 조선은행 대구지점으로 갔다. 그는 국고계 주임 복지흥삼(福地興三)을 찾아 "선물 배달 왔습니다" 하며 벌꿀 상자를 건넸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일본인 은행원 길촌결(吉村潔)이 다가와 나무상자를 풀었다. 상자 안에는 도화선에 불이 붙은 폭탄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폭발 직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