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대배치 후 나는 교육을 받으면서 필기를 할 때면 고참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일부러 한자를 썼다. 그래야 내 생각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첩 위에 시커멓게 칠해진 부분, 나는 그곳에 '의무대 ×병장 ×새끼'라고 썼다가 지웠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보통 사람들처럼 살았다면 그도 자식을 군대에 보냈을 텐데 말이다.
임종일
내가 편지를 찾아달라고 하면서부터 소대의 분위기가 싹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소대 고참들은 처음부터 나를 대하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가끔씩 대대와 연대의 보안대에서 소대상황병이나 소대장을 통해 나에 대해 묻곤 했단다. 그래서 처음에는 내가 보안사에 무슨 '끝발'이라도 있어 곧 좋은 데로 전출될 것으로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고참들은 노골적으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등병 놈 새끼가 군기가 빠져서 그깟 편지 하나 없어졌다고 지랄을 한다'는 식이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철책 근무는 소위 군기반장으로 통하는 일병 최고참과 한 조를 이루었다.
갓 전입된 이등병은 대개 병장들과 한 조를 이루는데, 일부러 일병 최고참과 같이 초소에 투입되었다. 초소에 투입되자마자 전방 경계가 아니라 나는 '대가리 꼴아박기'부터 했다. 한겨울이었지만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그러다 순찰이 가까이 오면 벌떡 일어났고, 순찰이 지나가면 다시 머리를 박아야 했다. 나머지 내무반 생활을 말하기도 싫다.
탈영도 생각했다. 하지만 사방에 지뢰가 깔려 있는 최전방 철책에서 어디로 도망갈 곳이 없었다. 며칠째 되던 날, 역시나 초소에 투입되자마자 머리를 박으라고 하였다. 나는 그대로 서 있었다. 고참은 길길이 뛰었다. '쪼인트'가 까지고 주먹이 가슴팍으로 날아왔다. 그러나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나는 그 고참에게 또렷하게 말했다.
"나, 군대 들어오기 전에 당할 만큼 당한 사람이니까 그만 때리십시오. 더 이상 맞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한테 온 편지 찾아주지 않으면 편지를 찾을 때까지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한테까지 보고할 것입니다!"최전방 철책은 최고 지휘관들이 수시로 순찰을 돌기 때문에 보고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내 말에 고참은 코웃음을 치며 험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나는 어느 한순간 초소를 이탈했다. 실탄 560발과 수류탄 2발을 가진 채였다. 사고를 칠 생각은 결코 없었지만 그 순간의 행동은 당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소대가 발칵 뒤집혔다. 전반조 근무를 마치고 곤하게 잠을 자던 소대원들이 일어나 한밤중에 불도 밝히지 못한 채 나를 찾아다녔다. 한 시간 뒤쯤 나는 내 발로 복귀했다. 다음 날 아침, 잃어 버렸던 편지가 꾸깃꾸깃 접히고 찢긴 채로 내게 돌아왔다. 그 다음부터 소대생활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것이다.
울산에서 대학을 다니다 입대했던 내 동기는 탈영을 하다 잡혔고, 어떤 동기는 견디다 못해 자신의 총으로 발등을 쏘고서 남한산성(육군교도소)으로 갔다는 말도 들었다. 나 역시 차라리 그렇게 되길 바랄 정도였다.
휴가도 제때 가지 못했다. 남들은 6개월이면 가는 정기휴가를 나는 1년이 다 되도록 가지 못 했다. 물론 보안사의 통제 때문이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첫 휴가 때였다. 대대장에게 휴가신고를 마치고 휴가비까지 지급해 놓고서는 정작 휴가증은 주지 않아 밥도 먹지 않고 내무반에 드러누워 농성 아닌 농성을 하기도 했다.
그럴 정도였으니 포상휴가는 꿈도 꾸지 못했다. 웅변 솜씨가 있던 나는 연대, 사단, 군단 대회에까지 나가 수차례 1등을 했는데도 포상휴가는 없었다. 어떤 때는 내 성적을 조작하여 아예 입상을 못하도록 했다.
문제는 사병이 아니라 지휘관이다어렵게 사병생활을 하던 중에 나를 살린 것은 일선 지휘관의 관심과 배려였다. 그 중에 손꼽는 분이 당시 중대장님이었던 엄명재(마지막 함자가 재인지, 길인지 기억이 가물하다) 대위였다. 중대장은 내가 일병을 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나를 중대본부의 교육계(작전병)로 발탁했다.
처음에는 인사계로 쓰려다 보안사의 반대로 물러났다가 기어이 나를 본부로 불러들인 것이다. 거기에 큰 힘을 실어준 것이 당시 대대장님이었던 김영길 중령이었다. 갑종 출신(사병으로 입대하여 간부후보학교를 거쳐 장교로 복무)으로 월남전에도 다녀왔다는 그분은 수시로 나를 찾아 대화를 나누며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두 분 덕분에 힘들었던 소대생활을 탈출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랑이지만, 작전병으로서 나의 임무수행능력은 100% 이상이었다. 대대장님이 "너 제대할 때 육군 소위 계급장 달아줘도 아깝지 않겠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군대는 계급도 중요하지만 보직이 더 힘을 발휘한다. 그래, 사실 본부에 있으면서 나를 괴롭혔던 이들에게 적당히 복수도 해주었다.
그렇다고 나머지 군대생활이 마냥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제대를 앞두고 보안사에 끌려가 녹화사업을 받고 돌아왔을 때 대대장님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임 병장, 미안하다. 나는 솔직히 니가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대대장으로서 정말 미안하다!"그 한 마디에 군에 맺혔던 숱한 원망이 다 씻어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내게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두 분의 일선 지휘관이 있었기에 나는 무사히 만기제대 할 수 있었다.
군 통수권자가 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