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한 장면.
영화 <엽기적인 그녀>
그나마 전지현은 예쁘기라도 하지. 때는 1979년 여름,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었다. 그 사건은 40여 년 동안 끔찍한 악몽처럼 나를 따라다닌, 상상조차 못했던 인생 최대의 굴욕이었다.
"어떻게 이걸 가지고 버스에 타... 창피하게"그날도 어머니는 나에게 외할머니댁에 가져다 주라고 커다란 양동이를 건네준다. 그것은 바로 외할머니댁에서 키우는 개나 돼지에게 줄 양식이었다. 근처 식당에서 모아놓은 음식 찌꺼기를 모아 가축 사료로 요긴하게 썼던 할머니를 위해 어머니가 부지런히 모아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집에서 버스로 한 시간 정도 거리인 외할머니 집에 그걸 배달하라니…. 정말 해도 너무한 건 아닌가.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불볕더위에 썩어가는 음식물의 역한 냄새를 막기 위해 뚜껑 대신 비닐과 고무줄로 둘둘 감아놓았지만, 냄새와 모양새는 어쩔 수 없다.
"아, 창피하게 이걸 가지고 어떻게 버스를 타요!"
"네가 가느냐? 버스가 가지! 금방이면 가니까 조금만 참아! 다른 애들은 이것보다 더한 심부름도 잘하는데 왜 못 한다고 난리야!"
"더럽고 무겁고 냄새나고…. 난 절대 안 갈래!"
유달리 비위가 약했던 나였다. 완강히 거부하며 맞서자 "뭐 하고 있어!"란 어머니의 불호령과 함께 내 손에는 어느새 양동이가 들리고 말았다.
잠시 후 무거운 양동이를 낑낑거리며 버스에 몸을 실은 나에게 일생 최대의 무시무시한 공포가 다가올 줄이야. 정말이지 꿈에서도 겪지 못한 일이었다. 인터넷 유머에서나 나올 법한 최악의 굴욕을 몸소 실천한 민폐남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나였다.
무겁고 냄새 나는 돼지밥을 들고 버스에 오르자, 코를 찌르는 역겨운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승객들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눈을 질끈 감고 돼지밥의 손잡이를 꼭 붙들었다. 하지만, 버스 안의 평화는 딱 거기까지였다. 아,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출발한 지 10분이나 지났을까. 일사천리로 잘 간다 싶던 버스는 내리막길에서 결국 대형사고(?)를 쳤다.
시골 길을 쌩쌩 달리던 버스는 갑자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리막길에서 급정거를 해버렸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순간 몸이 기우뚱하는 찰나, 그만 돼지밥의 손잡이를 놓치고 말았다. 양동이에 담긴 돼지밥은 바닥에 엎질러져 이미 버스는 돼지우리나 다름없는 상태가 됐다.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었다.
12살 먹은 초등학교 5학년이 감당하기엔 너무도 큰 사건이었다. 그러나 상상도 못 한 그 장면은 영화가 아닌 현실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고약한 냄새나 더러운 걸 보면 헛구역질부터 먼저 하는 유난히 비위가 약했던 나였지만, 코를 부여잡을 겨를조차 없었다. '웩'하며 입을 막는다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